베이징 기행/미산 윤의섭
오늘은 온종일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엇그제는 베이징의 여름 날씨가 혹독하리만큼 뜨거웠는데 오늘 낮부터 퍼붓든 빗줄기가 저녁이 되어도 계속이였다. 우리 일행이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중형버스가 비를 맞으며 배수가 넘쳐 홍수를 이루는 바다 같은 베이징 시가지를 지나갔다. 비 내리는 차창 밖의 행인들이 무릎까지 올라와 물바다가 된 거리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버스정거장 주변에 모여있는 것이 보인다. 일행은 외국의 풍경이므로 우리나라에서 매년 우기에 당하는 폭우이려니 생각하고 밤늦게 돌아다녔다. 야경을 보는 호기심에 홍수의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밤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이틑날 뉴스를 보니 베이징 역사상 처음 맞는 대홍수라 하며 100만 명의 수재민과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수해를 발표하였다. 특히 베이징 주변지방은 대륙의 편서풍 지대로서 여름철 남태평양의 북상하는 기류의 진로가 한반도 주변에서 서쪽으로 휘기 때문에 태풍이나 큰비의 전선이 북중국 지방으로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기상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최근 뉴스에 자주 나오 는 지구 온난화로 북극 시베리아의 빙하가 녹아 냉기의 방벽이 약해져서 남쪽의 장마전선이 올라간 것 아닐가?
지상 최대의 인공 구조물인 만리장성의 한가닥인 거용관을 보니 천하제일 웅관 天下第一雄關 이란 현판이 보인다. 산세의 험함이 대단한 협곡인데 높은 산비탈과 능선, 산봉우리를 막은 험준한 성이 보이는데 성벽은 흙을 구워 만든 전석 磚石으로 쌓았다. 수백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작업 중 희생된 원혼이 백만이 넘어 궂은 날이면 귀신의 우는 소라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산성의 나라인 우리나라의 성을 보면 한결같이 산세를 의지하여 최소한의 주변을 둘러막아 적을 막고 때를 보아 나가 싸워 적을 물리치는 방식으로써 백성에게 성을 쌓는 수고를 적게 하여 폐해를 주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기능을 한 것인데 비하여 만리장성은 끝없이 길기만 하니 불가사의할 뿐이다.
베이징은 산과 강이 멀리 있고 습지가 곳곳에 있는 황량한 평지이지만 북방 유목 민족인 흉노 몽골 거란 여진족이 남하 침입하여, 장차 황하와 장강의 광활한 영토를 관활하기에 적합한 지정학적 위치로서 통일 중국의 수도로 정한 곳이다. 건조한 초원에서 물을 찾아다니던 유목민이다 보니 물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물은 정원의 꽃보다 아름다웠다. 궁성 여기저기 호수를 파고 물이 돌게 하였다. 베이징의 버드나무는 동북방 유목민족이 신목 神木으로 받드는 나무였으니 유난히 많이 심은 것이 아닐까? 요, 금나라 때부터 서쪽의 황하유역 한족의 옛 도읍인 서안(장안)을 폐하고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중도라 하였고, 몽골의 쿠비라이칸이 남송을 평정하고 원을 세워 황제로 오른 후 거대한 궁성을 건축하고 대도라 하였다. 1421년 한족인 명의 성조 때에 원대의 고궁 옆에 지금의 황궁을 건축하고 자금성이라 한 것이다.
자금성은 세계 최대의 궁궐로서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과 9900칸의 방이 있는데, 그 안의 내관 궁인 수만 명이 있었다 한다. 간소하고 청아한 조선의 궁궐은 100칸이다. 불가사의한 과대가 아닐까? 자금성의 정문 오문 午門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그 안의 천안문이 남아 지금의 이른 것이다. 그 넓은 전각과 뜰 주변 어디에도 나무가 없었다. 자객이 숨어드는 걸 막기 위해서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이다, 중국 고성들은 성 주변으로 해자(垓字: 땅을 파고 물을 채운 방어시설)를 팠는데 고궁은 황성답게 강줄기를 끌어 온 것이다. 자금성의 후문을 나와 전통의 주거 양식인 정사각형 쓰허위안(四合院)의 고전마을을 보았다. 옛 몽골 관원이 거주하던 골목 길로 인력 자전거를 타고 관광하였는데 고태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만주족인 청 淸의 수도를 거처 현대 중국의 수도가 된 베이징은 넓은 평원에 전조후시 前朝後市 (궁궐을 앞에, 시장을 뒤에 배치)와 좌묘우사 左廟右社(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배치)의 원칙하에 기하학적으로 세워진 계획도시다. 이러한 도시에 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도시가 확장되었고 중국의 현대화로 중앙에 설치되는 거대한 시설들과 어우러저 무진장의 볼거리가 있다. 아시아 대륙의 동부에 우리나라와 이웃하여 광활한 국토를 이루고 13억이란 거대인구, 50여 족의 다민족이 분포한 국가의 수도로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베이징에 대하여 역사적 문화예술 고궁 박물관 만리장성 고적, 그리고 현대에 건설한 정치 중심과 문물의 다양함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관광이 자유롭고 교류가 활발해진 현대에 이르러 한나라의 수도를 가 본다는 것이 보편적인 유행이 된 지금, 특히 베이징은 그 다양성의 무한함에 뜻이 깊고 이웃인 우리에게는 역사적 연고가 무수히 많이 얽혀 있음을 생각할 때 많이 보아 두어야 하리라 느낀다.
베이징의 그 많은 이야깃거리 중에서 만리장성과 자금성은 반만년 역사를 함께 살아온 이웃 나라로서, 그리고 그들이 중화주의에 빠져 대국의 중심사상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폐단이 있어 그럴 때 마다, 우리나라는 인접국으로서 역사적으로 일방적인 피해를 본 경험을 잊지 않고,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올바른 관찰과 역사의식, 선린 의식을 높이는데 관점을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마침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이래 선진화를 이룩하여 현대의 중국을 앞서 가고 있는 모범국이 되어 있는데 이러한 때일수록 수준 높은 국민의식을 갖고 국제 감각을 한층 고양하여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더욱이 지금의 중국은 선진국을 따라잡으려고 그들의 역량을 총 집결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중국의 일부 고전적 중화주의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어 동북공정 등 역사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진 만리장성 시점始点인 산해관을 왜곡하여 요하를 넘어 압록강하구 단동이 시점이라고 수정하는 사례도 있다.
현대 중국의 정신적 대부로 불리는 주은래 周恩來가 일직이 중국 건설 초기 총리로 있을 때 북한과 외교 대화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동북지방의 조선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인정하였다. "조선 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 송화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 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 圖們江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또 중국 측의 조선을 보는 태도에 대하여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 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러분의 머리 위에 조선족은 ‘기자 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미래를 위한 바른말을 한 정치가도 있음을 상기하면서 이 글을 쓴다.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미래를 보는 아이 상진 이와 승진 이와 함께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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