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의 자가 수필

일본에게 충고한다

새밀 2012. 8. 15. 11:09

 

일본에게 충고 한다/미산 윤의섭

 

한.중.일 3국의 역사적 대사건인 8.15. 광복 및 종전의 67주년을 맞아 아직도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안타까운 사정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나는 경기도 변두리 시골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던 중에 1945.8.15 해방과

광복을 맞았다. 그 또래가 되면 몸은 아직 아이이지만 마음은 어른을 따라 잡는다고 한다.

나는 그 동심의 기억이 67년이 흐른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어 그 체험을 회고하며

오늘의 글을 쓴다. 주관적인 내용이 대부분이 되겠지만, 역사의 한 단면을 쪼갠 후

속에 박힌 한편의 화석을 관찰한다고 생각하고 쓴다.

 

온 나라가 일본식으로 된 환경이니 이름도 성도 일본식이요 사회의 모든 것이 일본풍으로

되어 있고 학교의 책도 말도 일본식이다.

태어나면서 부모에게서 터득한 조선말을 하는 어린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일본어 교과서를

배우고 일상 언어를 일본말로 하는 것이다. 시골 외진 곳이다 보니 일본인 선생이 하나도 없고

조선 선생님으로 짜여 있었으나 조선의 언어와 풍속은 금기하는 태도를 보여 알 수가 없었다.

학생에게 경쟁적으로 일본말을 습득하게하여 일본식 교육의 진도를 높이는데 주력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조선의 문화적 역사적 내용을 추측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집에서는 부모의 조선어와 조선풍속의 음식과 치레가 은근히 마음에 걸리기도 하였다.

막연하나마 신문명에서 도태되는 구태의연한 야만의 찌꺼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일본 지식인이나 앞서 가는 조선 지식인에서 풍기는 것이 어린 마음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일본화되어가는 성장 과정을 더욱 급하게 몰아 간 것은 일본의 내선일체 문화정책으로

조선인을 일본 본토인과 같은 황국신민으로 인정한다는 기만술이 어린 학생에게는 오히려

자랑스러운 동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말 없는 부모들은 조선식 음식을 먹고 조선말로 대하며 조선풍습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얄밉생각하였다. 초등학교 3.4학년이 되어 일본어를 터득하고 자유롭게 일본어를 구사하게

되니 시야에 느껴지는 일본의 청사진만 눈에 들어오고 누구는 일본의 상급학교를 진학하고

누구는 군청에 취직하고 누구는 고등 관이 되고 하는 조선인의 진출 과정을 동경하게 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징병과 징용으로 젊은이를 전쟁터로 보내는데 그럴 때마다 학생을

동원하여 쳘도역에 나가 소리높이 일본 군가를 외치게 했다. 전시동원을 위한다고 놋쇠그릇

비롯한 집안의 모든 쇠붙이를 바치게 했는데 우리집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황동화로 황동

대야 제기그릇 기타 커다란 그릇을 내놓으며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흘깃 보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야릇한 생각을 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에서는 광솔, 솔방울 수집 기타 수없이 많은 동원을 날마다 하는 바람에 어린 마음에 힘이

들었고 그렇게도 하기 싫었다. 그 수탈 중에는 벌목도 있었는데 조선왕릉 일원의 노송이 울창

하여 5km 떨어진 우리 마을까지 주변 산에 덮여있었다. 그 소나무를 모두 벌목하여 인근 철도

역전에 산더미같이 원목을 쌓아놓고 하역 작업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어린 마음은 산천이

벗겨지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시간만 있으면 벌목 하역을 구경하였다.

그때는 그것이 국난에 처한 구국행위로 생각하고 그저 흥분에 차 있었다.

동심이란 그때의 선도세력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는 비운을 격는다.

어린 눈으로 본 것이 그러할 때 전국의 그 거대한 민족자산의 수탈이 어떠했을까? 그동안

각종 자료와 기록이 수없이 많고, 일본이 수탈해간 조선 문화재를 그들이 보물이라고 보존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의 후세에 보기가 민망한 후유증으로

 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조국광복의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하루아침에 반전된 역사를 만나게 되였다.

이날부터 나는 완전히 딴 세상의 사람이 되어 새로 전개되는 세상의 흐름에 눈뜨게 되였고

나이답지 않게 어른들의 소식에 목말라하며 귀를 항상 열어놓고 살았다.

 

일반 민중을 사람의 신체에 비유한다면 몸체와 같아서 머리와 손발은 독립운동가나 반체제

인사 등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계급이고 일반 민중은 비정치적인 생존에 전념하게 되는

것으로 그때그때의 정치체제에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는데 특히, 외침에 의한 집단적 차별

책이 일어나면 생존의 본능적 발로에 의하여 침묵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피지배 민족이 문화적으로 우수할수록 속마음을 감추고 존속하는 능력이 뛰여 난 것이다.

그때에 어린 마음에 몰랐던 부모세대의 내성적 耐性的인 생활방식을 이해하게 되였고, 특히,

언어와 음식, 세시풍속, 4례 의식 등 사적 私的 생활을 조선식으로 지킴에 있어 아무리 어렵고

제약이 많아도 기어이 존속하며 사는 것은 뛰어난 우수민족의 유전자를 갖고 있음이라고 본다.

 

특히 우리 민족이 일제 밑의 현실사회에 참여하여 직업과 사업을 영위하면서 그 그룹의

일본인보다 우수한 성적을 내는 조선사람이 많았고 그 여세를 제2 제3의 진출과 연고를

이어내며 장차 우리 민족의 힘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 잠재 세력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힘이 바로 위에 언급한 조선식 전통민족의 내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당할 때마다 끈질긴 저항과 인내의

지혜로 되살아나서 민족이 소멸하지 않고 반만년 역사에 민족정기가 끊어지지 않았다.

세계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민족이 지구 상에서 소멸하였는데 그 이유는 외침 시에 언어와

풍속 문화를 상실한 경우에 재기의 기회가 돌아와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한.중.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보자.

중국은 대륙국가로서 북서남 방면의 무한대라 할 만큼 거대한 영토를 품고 있으면서 동양 3국

의 문화와 힘의 중심이 되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은 해양국가로서 동남 방면의 무한대라 할 만큼 거대한 바다를 끼고 그 천혜의 이로움을

마음껏 향유하면서 동양 3국의 한 축으로서 서구 문명에 먼저 접목하여 현대적 선진화를 이루

었다.

 

양대국의 틈에 있는 우리나라는 인구와 국토 그리고 바다의 포용 규모가 중국, 일본에 비할

바가 못 되게 적다. 국세의 단순한 비교를 해보면 큰 차이의 열세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기마 유목민이 물과 살기 좋은 옥토를 찾아 동방으로 남방

으로 이주하여 최종 정착한 대륙의 끝자락이 조선반도이다.

수천 년 동안 안착 축적된 민족성은 개척과 진취성, 신지식의 유입 축적으로 선진적 생활개선

꾸준히 일어나며 토착화로 굳어졌다.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한국의 남단 전라도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이 고인돌은 중앙아시아 북아시아 몽골리안 루트를 따라 만주 조선반도로 분포

되어 있는데 그중 90%가 전라도에 분포하여 있다고 한다.

우수해진 민족성은 대륙에서 일어나는 세력과 해양세력의 외침을 막아 내는 자생력이 생겼고

오히려 동양 3국의 문화와 지식교류를 이루는 힘의 균형자로서 정립 鼎立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활발한 교류의 시대에는 더욱 그것이 긴요하며 중간 위치의 "허브"로서 기능할 것이

기대된다.

 

이와 같은 3국의 환경이 서로 작용하여 평화 시에는 상승효과를 내며 발전하다가 불화

시에는 침략 수탈 점령이 반복되는 역사를 이루고 있다.

과욕의 정치가나 공명심에 빠진 정치 그룹이 일어나면 불화 침략의 시대가 더욱 두둘어 졌다.

근대의 일제 침략과 태평양전쟁 패전도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의 과욕이 낭패를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양 3국의 지정학적 환경으로 볼 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다.

 

오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역사적 지정학적 특성을 3국이 공유 이해하고 

세계화 정책과 FTA 기타 국제조약을 맺어 소통하며 현대적 국제 교류 기능을 높여 나가야

한다. 3국의 국민이 연간 천 만 명이 넘게 상대국을 서로 방문하고 수 천억 불의 수출입 물자를

소통하는 이때에, 역사적 구원 舊怨이나 국경선 분쟁 기타 이권을 국가적으로 지나치게

주장하지 말았으면 한다.

 

와 같은 역사적 지정학적 그리고 신사조는 이미 역사가, 전문가들이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고 보완 수정될 것이다.

인터넷 등 지식정보의 발달로 능히 세상이 잘 알게 되고 스스로 조절되어 갈 것이다.

보편타당한 지식은 앞으로 세계화하면서 더욱 빨리 그리고 정당하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요사이 일고 있는 중동의 민주화나 각국의 인권 신장 그리고 에너지 고갈에 대한 국제적인

자연보호운동 등을 보면 능히 미래예측이 가능하다.

3국은 지식 정보화의 미래를 맞아 얼마든지 머리를 맞대고 호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양보하는 측에게 상당한 대가를 내는 선린의례 善隣儀禮로 발전하리라 예상해 본다.

 

일본은 과거 36년간의 조선 침략 피해 청산의 미진한 부분을 조속히 청산하고 국경선의 현상

유지를 최선으로 믿고 서로 신뢰를 쌓아 갔으면 한다.

너무 성급하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부 정치세력에 신중함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평화를 사랑하고 성취의 보람을 느끼며 사는는 3국의 국민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믿는다.

근대에 실수를 범한 경험이 있는 일본의 국민은 더욱 그것에 책임을 느끼고 원하리라 믿는다.

 

2차 대전중의 적대 측에게 잔혹한 피해를 준 독일이 전후에 사죄하고 보상을 하였음은 물론

67년이 흐른 요즈음까지도 잊지 않고 새로 알려지는 피해흔적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보상하고

미해결사항을 끝까지 추적 조치하며 명예회복 조치와 선린의 상태 복원에 힘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 신선한 것은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그들이 추가로 알려진 피해흔적

을 인정 수용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그들이 패전에서 소멸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선린을 도모하는 것은 후세에 미해결의 찌꺼기를

넘겨주지 않으려는 지혜가 아닌가? 지속 가능한 영구평화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