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69주년.인천상륙작전

새밀 2019. 9. 17. 14:11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남침 이후

거듭된 패퇴로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한국인에게

서울 수복 후 통일을 기대할 수 있게

힘을 더해 준 한국의 진정한 ‘벗'이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사에서 “만약 한국이 공산당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면 나는 한국을 캘리포니아주와 같이 방위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약속은 6․25전쟁 때 실현되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은 1950년 6월 29일 한강전선을 시찰한 후 북한군이 한국군을 압도한다면서 미 지상군의 개입을 직접 요청했다.

 

그는 1951년 4월 해임되기 전까지 한국전선을 10회 이상 방문해서 한국인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한강전선 방문과 인천상륙작전 구상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은 공세를 계속 퍼부었다.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의 교착상태를 타파하고 전쟁의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지상군의 병력증강을 통해 북한군을 정면에서 돌파하는 방안이 많은 희생과 장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여, 적 후방으로 상륙하여 포위 혹은 교란작전을 수행하는 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상륙작전의 대상 지역으로 인천, 진남포, 군산 등이 논의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주장했으나, 미 합참은 인천이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상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 작전이 낙동강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군에 직접적인 타격이 될 수 없다는 등을 이유로 그의 계획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브래들리(Omar Bradley) 합참 의장 마저 해병대식 전투는 과거의 일이라고 반대했다.

 

러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구상과 계획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의 남침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도쿄에서 4대의 전투기로 북한군의 공습을 저지시키면서 날아와서 한강 전선이 보이는 신길동 근처까지 직접 방문하여 전황을 시찰할 때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상륙작전과 맥아더의 역할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전략적 우수성은 국방부와 미 합동참모부, 심지어 상륙작전을 실행할 해군과 해병대의 반대를 극복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하순 미 제24사단과 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는 동안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킬 것을 구상했다. 하지만, 미 지상군의 잇단 패배로 상륙작전이 취소되었다. 그는 상륙작전 계획을 완전 폐기하지 않고, 계속되는 패전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확신했다.

 

7월 23일,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 구상을 합참에 제안했고,

8월 12일 극동군사령부에서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s)이라는 상륙작전 계획안을 마련했다.

 

21일 콜린스(Joseph L. Collins) 육군 참모총장과 셔먼 (Forrest. P. Sherman) 해군 참모총장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안을 단념시키기 위해 도쿄를 방문하였으나 오히려 설득을 당했다.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은 군산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인천의 많은 약점을 극복하고 거꾸로 역습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했다.

결국 9월 9일 미 합참은 상륙지점을 군산으로 종용하면서도 맥아더의 계획을 최종 승인했다.

 

작전 협의과정에서 군산 이외에도 미 해군은 평택의 포승면을 제시했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을 고집했다. 인천은 서울의 관문으로, 한국의 ‘수도’라는 상징성 외에도 경제와 교통 및 보급로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군산에 상륙할 경우, 지형적 요소로 인해 상륙작전에 쉽게 성공할 수 있었을 지라도 낙동강 전선과 연계 가능성이 높고 서울까지 거리가 있어 서울 재수복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준비기간이 매우 짧았는데도 이를 성공시켰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상륙작전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면 작전 전에 병력동원, 첩보수집, 군수지원 등 충분한 준비가 매우 중요했다. 노르망디 상륙전을 준비하는데 꼬박 1년이 소요되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은 단 23일이 걸렸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6․25전쟁사에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남침 이후 거의 3개월 동안 지속된 주도권을 잃게 된 반면에 아군은 공세권을 확보함으로써 전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9월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추가로 남한지역으로부터 청장년을 동원하여 9개 사단을 편성하고 북한에서 새로 6개 사단을 창설하여 전 한반도를 장악하려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게 인천-서울지역과 진남포-평양지역을 특별히 경계할 것을 조언했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는 이러한 김일성의 무력통일론을 파탄시켰다.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수 많은 주민들은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아군은 추수기 이전에 남한의 곡창지대를 회복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겨울철에 대비하여 국민들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는 승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을을 지나면, 곧 닥칠 겨울에 피난민구호가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38선 북진과 한국인의 통일 기대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진격에 대해 미 군부는 물론 국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케난(George F. Kennan) 국무부 고문과 니츠(Paul Nitze)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등은 38선을 넘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도 1950년 9월 11일 소련이나 중국이 개입하지 않는 조건 아래 38선 이북에서 유엔군 작전을 승인했다.

 

9월 27일 마셜(George C. Marshall) 국방장관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낼 명령서에는 군사행동의 목표를 ‘북한군대의 궤멸’로 규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950년 8월 15일, ‘국난극복총궐기대회’에서 80만 부산 시민을 대표하여 맥아더 사령관에게 시급히 북한군을 격퇴시킬 뿐만 아니라 ‘괴뢰집단의 소굴’까지 분쇄할 수 있는 다량의 무기와 병력을 신속히 증파할 것을 요구하면서, “우리 국민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통일국가 건설의 성전에 돌진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국민들은 침략의 근원인 북한 정권을 타도하지 않고 재건과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아래 통일을 기대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지만, 중공군 개입에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 미 극동군사령부에서는 이미 8월 하순에 두 개의 중공 야전군이 중국 남부지역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북한군이 패퇴하면 만주지역에 있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 군부는 만주에 집결하고 있던 대규모의 중공군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개입에 대해 오판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압록강을 가로지를 때 간단히 격파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개입 이후, 맥아더 장군은 그들의 공세를 저지시키기 위해 만주지역 폭격, 원자폭탄 투하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전쟁 확대론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것을 우려하여 전쟁을 제한하려 했다. 중공군과 5차례 접전 후 휴전을 모색하려는 트루먼 대통령과는 달리, 맥아더 사령관은 작전지역을 중국까지 확대하려 하다가 결국 1951년 4월 해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