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4) 중국인의 몽골리안 콤플렉스[안세영의 중국..] 북위-수-당 역사 주역 탁발선비[윤명옥의 중국기행]

새밀 2019. 8. 31. 12:35


거창한 '중화민족 부흥' 슬로건…그 뒤엔 '몽골리안 콤플렉스' 있다

입력2019.08.02 17:16 수정2019.08.03 00:10
[안세영의 중국 바로 읽기]
(4) 중국인의 몽골리안 콤플렉스

中 역사 절반을 非한족이 통치
'실크로드 FTA' 구현한 몽골제국
중국은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으며 92%가 한족이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681년밖에 안 된다. 중국 공산당 최대 연례행사인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소수민족들. 연합뉴스

중국은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으며 92%가 한족이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681년밖에 안 된다. 중국 공산당 최대 연례행사인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소수민족들. 연합뉴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몇 년 전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틈만 나면 내세우는 말이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지만 92%가 한족이다. 그동안 이 ‘붉은 중국’은 ‘인민해방’ ‘사회주의 혁명’ 같은 공산주의 슬로건을 주로 내세웠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한족이 절대다수인 중화민족의 부흥, 그것도 ‘위대한’이란 형용사까지 붙이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중국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의 역사를 들춰봐야 한다. 역대 왕조를 한족 왕조와 비한족(非漢族) 왕조로 이분해 보면 놀랍게도 순수한 한족이 세운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딱 681년이다. 한나라 405년과 명나라 276년뿐이다. 나머지 기간은 모두 선비, 거란, 몽골, 여진, 돌궐 심지어는 흉노계 등 비한족이 세운 나라들이 지배했다. 쉽게 말하면 한족보다 비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손문이 청왕조를 무너뜨려 중화민국을 세웠고, 1949년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청왕조 300여 년을 뒤로하고 한족이 중원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런 배경에서 과거 그들을 지배하던 소수민족까지 한족이 주축이 된 중화민족에 포함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中 역사 절반은 몽골리안이 지배

북방 민족사(民族史)에서 보면 중국을 지배한 비한족은 거란, 몽골, 여진 같은 북방민족인 ‘북방 몽골리안’이다. 이들의 중국 통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중국 대륙을 완전히 지배한 경우다. 몽골의 원나라가 108년(1260~1368년), 청나라가 293년(1616~1912년)간 중원을 지배했다. 인구가 수백만 명밖에 안 되는 몽골족과 만주족이 수억 명의 한족을 400여 년간 통치한 셈이다. 둘째, 한족 왕조와 비한족 왕조가 중국을 나눠 지배한 시기다. 당나라가 망한 뒤 5대 10국 시대(907~960년)도 남중국에 있던 10개국을 빼고 화북지방에 있던 후량, 후주 등 5개 왕조가 순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세운 왕조였다. 960년 한족이 송나라를 세웠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북송시대(960~1127년), 지금의 베이징을 포함한 화북지방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907~1125년)가 차지하고 있었다. 남송(1127~1279년)도 여진이 세운 금나라(1115~1234년)에 1127년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당하고 남쪽 임안(지금의 항저우)으로 쫓겨 갔다. 중국인이 한족 왕조라고 말하는 수나라(581~619년)도 선비족의 탁발부 출신인 양견(수 문제)이 세운 나라고, 당나라(618~907년)도 순수한 한족 왕조가 아니라 탁발 선비 계통의 왕조다.(양하이잉, <반중국의 역사>, 2016)

몽골리안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족 왕조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한나라가 역사상 최초의 한족 왕조다. 우리와 인종이 다른 지나족(支那族)에 뿌리를 둔 ‘한족’이란 개념도 이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고조 유방은 오랑캐 흉노를 깔보고 친정(親征)했다가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거짓 후퇴하는 흉노의 유인전술에 걸려들어 백등산에서 선우묵돌 왕의 대군에 포위당했다가 흉노왕의 여인에게 후한 선물을 주고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그 후 한나라는 공주를 흉노에 시집보내고 매년 비단, 곡물도 바쳐야 했다. 중국 역사는 이를 두고 한나라가 오랑캐 흉노에 하사(下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흉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공(!)했는지도 모른다.

군사력이 약한 북송도 1004년 요나라와 ‘단연의 맹서’를 맺고,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銀) 10만 냥을 바쳤다. 남송 또한 금나라에 세공(歲貢)을 하며 왕조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1279년 몽골의 대칸인 쿠빌라이 칸에게 멸망한다.

한자문명에 의해 왜곡된 몽골리안 세계

역사의 피해자가 승자의 역사를 기술한다면 당연히 짓밟힌 분노가 붓끝에 담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거의 모든 흉노, 거란, 돌궐, 위구르의 역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 등과 같이 한자로 쓰였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원사(元史)’인데 이건 피해자인 한족의 나라, 명나라가 쓴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한자로 쓰인 북방 몽골리안의 역사는 상당 부분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북방민족은 활이나 쏘며 약탈하는 그런 야만인이 아니었다. 서양에서조차 잔인한 약탈자, 파괴자로 묘사되는 몽골제국을 한번 재조명해보자. 몽골제국에 대한 역사는 한자 말고도 세계 20여 개 국어로 쓰여 있다. 아브라함 도손의 ‘몽골사(Histoire des Mongols)’ 같은 서양 사료(史料)와 함께 ‘몽골비사’, ‘집사(集史)’ 등 몽골 쪽에서 쓴 역사가 남아 있다. 의외로 몽골제국의 경영에 참여한 무슬림 상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쓴 역서도 많아 이를 통해 몽골제국의 진면목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실크로드 FTA’ 구현한 ‘팍스 - 몽골리카’

거창한 '중화민족 부흥' 슬로건…그 뒤엔 '몽골리안 콤플렉스' 있다

몽골 기마군단은 정복 과정에서 약탈과 파괴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일단 제국을 건설하고 나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창한 글로벌 통상대국을 만들었다. 당나라 장안(지금의 시안)의 비단이 실크로드를 지나 유럽에 도착하면 가격이 무려 100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낙타 등에 비단을 싣고 먼 길을 가려면 비용과 리스크도 문제지만, 수많은 왕국을 지나야 하고 그때마다 통행세 등 온갖 구실로 뜯기고 또 뜯겼을 것이다.

그런데 몽골제국은 이런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줬다. 제국 내 무역에서 모든 국경 통행세(관세)를 철폐하고, 대신 최종 목적지에서 물건을 팔 때 판매가격의 30분의 1을 상품세로 받았다.(스기야마 마사아키,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2011) 오늘날로 말하면 실크로드에 있던 수많은 나라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셈이다. 그러니 자연히 동서 간에 교역이 활발해지고 제국은 번성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이 지금의 바그다드에 있던 호라즘 제국을 정벌하러 나섰을 당시 그곳은 몽골군이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그때 길을 안내한 것이 실크로드를 오가던 페르시아와 위구르 상인들이었다. 어찌 보면 몽골제국은 몽골 기마군단과 페르시아-위구르 상인이 합작한 군상(軍商) 복합 글로벌 비즈니스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신분과 혈연으로 뒤얽힌 농경민족과 달리 몽골제국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인종, 지위, 종교를 불문하고 원한다면 외부인을 ‘몽골집단(Mongol Ullus)’으로 받아줬다. 물론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천인장(千人長), 만인장(萬人長)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에 머물며 세금징수관을 했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카라코룸에는 불교, 라마교, 이슬람교에서부터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까지 있었다고 한다.

‘소중화’에서 ‘북방 몽골리안’으로

과거 우리는 한족 왕조인 한(漢), 송(宋), 명(明)나라만 숭상했다. 우리를 ‘작은 중국’,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칭하며 북방민족을 오랑캐라고 깔보고 그들이 세운 원(元), 청나라엔 진심으로 복속하지 않았다. 병자호란도 따지고 보면 친명배청(親明排淸) 사상에서 신흥왕조 청을 무시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따르다가 자초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중국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란 뜻의 동이(東夷), 명나라는 좀 봐줘서 조선을 순이(順夷), 즉 ‘말을 잘 듣는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건 확실히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모화(慕華)사상에 빠져 우리의 정체성을 소중화에 두고 두 나라 역사를 양자관계로 보면 ‘중화제국-속국’ 같은 상하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패권국가로 부활하는 중화제국의 그늘로 다시 들어간다.

잘못된 소중화에서 벗어나 우리의 정체성을 혈연적, 언어적으로 우리 민족의 주류와 가까운 몽골, 여진, 튀르크 같은 북방 몽골리안에서 찾아보자.(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2014) 그러면 역사적 한·중 관계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어 그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역사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족의 DNA에는 바람과 같이 말 달리며 그들을 지배하던 북방 몽골리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든 개인이든 콤플렉스가 있으면 뭔가 허세를 부리고 유난을 떤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 들어 요란스러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너그럽게 이해해주면 된다.

한때 중원을 지배하던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일부가 외몽골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중화제국에 한화(漢化)되지 않고 세계 10위권의 ‘미들 파워’로서 건재하는 북방 몽골리안의 나라는 딱 한 나라, 한반도의 대한민국뿐이다.
거창한 '중화민족 부흥' 슬로건…그 뒤엔 '몽골리안 콤플렉스' 있다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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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당 역사 이끈 탁발선비, 그들 발원지/알선동

[윤태옥의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네이멍구 알선동

                    

북방 탁발선비의 발원지인 네이멍구자치구 후룬베이얼시 어룬춘 아리허진의 외곽 산속에 있는 알선동. [사진 윤태옥]

솔체꽃과 개미취, 둥근이질풀은 보라색을 자랑한다. 배초향도 무리 지어 보라색을 노래하고, 분홍바늘꽃도 보라색 꽃잎을 방긋거린다. 층층잔대도 작은 종 모양의 보라색 꽃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길게 삐져나온 꽃술이 신비의 바늘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마타리와 애기똥풀은 강렬한 노란색으로 푸른 숲에서 홀로 튀어 오른다.
 

대흥안령 산속의 알선동 가는 길
솔체꽃·개미취·오이풀 등 흐드러져
남천 두 차례, 드라마보다 더 극적

북주·수·당 세 왕조 ‘한통속 집안’
독고신의 세 딸은 각각 황후 올라
마오쩌둥 대장정도 변방서 시작

독특한 모양도 많다. 오이풀은 벌레의 꼬치가 시커멓게 말라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알갱이 하나하나가 꽃으로 피어난다. 그렇게 나온 오이풀의 주홍색 꽃잎은 작지만 찬란하다. 쉬땅나무는 일부만 꽃잎을 열고 있으면 아직 열리지 않은 꽃망울과 이중창을 하는 느낌이다. 두메부추도 쉬땅나무 꽃과 비슷해서 하얀 횃불 모양이다. 200여m밖에 되지 않는 길을 걸으면서 내 눈에 담긴 야생화들이다. 그야말로 야생화 천지다.
 

가을에 찾은 대흥안령. [사진 윤태옥]

가을에 찾은 대흥안령. [사진 윤태옥]

동북아시아 지형도를 보면 대흥안령 산맥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만주의 서북쪽에 서남방향으로 1400㎞나 늘어져 있다. 북위 50도에 걸쳐진 대흥안령 북단의 어느 계곡은 이번 여름에도 야생화가 만발했다. 변방의 꽃들이다. 중원의 정원에서는 궁녀의 얼굴만 한 큼직한 모란꽃이 시인 묵객과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변방에서는 바람과 추위에 버티면서 작은 꽃과 가는 줄기로 질긴 생명력을 화려하게 이어간다.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이의 꽃밭을 한참 걸어가면 커다란 동굴이 나온다. 높이가 20여m, 폭이 27m, 깊이는 90m다. 널찍한 광장이 바위산 큰 입속에 들어앉은 듯하다. 동굴에 들어서면 신령스러운 느낌이 밀려온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후룬베이얼시 어룬춘 자치기 아리허진(阿里河鎭)의 외곽 산속에 있는 알선동(嘎仙洞)이다.
  
북위 세워 북중국 통일하고 호한 융합
 
내가 알선동을 처음 찾은 것은 2010년 8월 하순, 자작나무 잎사귀가 이미 노랗게 물들어 가는 계절이었다. 베이징에서 탄 기차에서 26시간을 앉아서 버티고, 씰룩씰룩거리고 쿵쾅쿵쾅대는 시외버스를 2시간여 견디고, 다시 허접한 시골 무면허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와서야 동굴 앞에 설 수 있었다. 나를 긴 여정을 감수하고도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이란, 박한제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역사기행서다.
 
범상치 않은 제목에 선비족 탁발부의 천년 역사가 응축돼 있다. 대흥안령 깊은 산속의 알선동 일대에서 살다가, 지금의 후룬베이얼 초원으로 일차 남천을 했다. 이곳에서 몸집을 키워서는 흉노고지까지 이차 남천을 하여 북위(北魏)를 세워 북중국을 통일했고, 호한(胡漢)을 융합하는 거대한 변혁을 이끌었고, 종국에는 대당제국에 이르는 대서사시다.
 

대흥안령 계곡에서 만난 야생화들. 왼쪽부터 개미취·솔체꽃·두메부추·분홍바늘꽃·애기똥풀. [사진 윤태옥] ※ 야생화 자문 조영학(『천마산에 꽃이 있다』저자)

대흥안령 계곡에서 만난 야생화들. 왼쪽부터 개미취·솔체꽃·두메부추·분홍바늘꽃·애기똥풀. [사진 윤태옥] ※ 야생화 자문 조영학(『천마산에 꽃이 있다』저자)

탁발선비의 북위가 대당제국으로 연결되는 과정은 드라마 이상의 드라마였다. 북중국을 통일하고 호한융합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에너지를 소진한 북위는 서위와 동위로 분열됐다. 동위는 고환이, 서위는 우문태가 실권자가 되어 탁발씨 황제를 휘둘렀다. 고환과 우문태 모두 아들대에 가서 탁발씨 황제를 폐하고 각각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라는 새 왕조를 열었다. 북제는 북주에 정벌당해 먼저 사라졌고, 북주는 다시 양견에게 먹혀 수나라가 됐다. 수나라는 남조의 진(陳)을 정벌해서 남북조를 통일했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이연의 당나라로 뒤집어졌다.
 
북위(16국)-서위(동위)-북주(북제)-수의 통일(남조)-대당제국으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가 복잡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정치적으로 북주·수·당 세 왕조는 ‘한통속 세 집안’이었던 것이다.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를 중심으로, 북위 무천진(武川鎭, 지금의 후허하오터시 무천구) 출신들이 탁발선비라는 울타리 안에서 결집(관롱집단)했다가 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며 정권을 탈취한 것이다. 수문제 양견과 당고조 이연 모두 관롱집단 출신이다. 이들이 한통속이란 것은 그들 사이의 혼맥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수나라는 북주의 사돈이고, 당나라는 북주의 사위다. 혼맥의 중심에는 독고신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의 세 딸은 각각 북주·수·당의 황후가 되었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알선동에서 시작된 두 번의 남천 역시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알선동 일대의 삼림 지대에서 살아오던 탁발선비는 기원전 1세기께 1차 남천을 했다. 서쪽으로 대흥안령을 넘었고 어얼구나강(아르군강, 현재 중국·러시아의 국경 하천)을 만나 남하하여 후룬호(呼倫湖) 일대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초원에 적응하며 힘을 키운 탁발선비는 3세기 초(2세기 중엽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시 서남으로 멀고 먼 2차 남천을 했다. 몇 번의 위기를 넘나들다가 탁발의로가 대국(代國 310~376년)을 세웠다.
  
변방은 다음 시대의 황제 배태한 곳
 
대국은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주저앉기도 했으나,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東晉)에 패하면서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탁발의로의 손자 탁발규 도무제는 386년 북위를 세우고 평성(平城, 지금의 산시성 다퉁 大同)으로 천도하여 평성시대를 열었다. 3대 황제인 탁발도 태무제는 북중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4대 문성제, 5대 헌문제, 6대 효문제까지 급진적인 호한융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관원들은 한족 복장을 착용하게 했고, 궁정에서는 선비어가 아닌 한어를 사용케 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전통적인 복성을 한족 방식의 단성으로 바꾸게 했다. 황제가 앞장서서 탁발씨를 원(元)씨로 개성했다. 호한융합의 하이라이트는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북위 탁발선비의 후예인 대당제국은 국제적인 수도 장안에서 꽃을 피웠다. 꽃은 실크로드의 종착이자 시발점인 서시(西市)에서 가장 화려하게 만발했다. 지금 그곳에 세워진 대당서시 박물관에서 돌아보면, 중원의 실체는 쟁투의 무대라는 생각이 든다. 변방은 무대로 오르는 대기실이었다. 중원의 황성에는 궁녀와 환관들이 가득 찼고, 도성에는 황제의 발치에 기대어 ‘입으로는 천하를 논하나 흉중에는 일계도 없는’ 군상들이 넘쳤다. 반대로 변방에는 황제가 없었다. 거칠게 깨진 원석들이 널려 있는 황무지였을 뿐. 그러나 변방은 다음 시대의 황제를 배태하고 미래의 제국이 고요하게 성장했던 곳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알선동이었고, 그것은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거란이 말 위에서의 정복자로 군림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은 그렇게 세계제국을 이루었고, 만주족은 동아시아 최대판도의 대청제국을 구가했다. 마오쩌둥이 권력을 쥔 것도 대장정, 곧 변방에서 변방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도주로에서였다. 변방의 작은 야생화들이 내 좁은 소견에 새삼 찬란하게 보였던 것은 이런 역사를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묘한 것은 그곳의 야생화들 대부분은 위도 차이가 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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