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의 자가 수필

복수와 관용 그 역사의 산책

새밀 2018. 5. 25. 10:40

복수와 관용 그 역사의 산책/미산 윤의섭


연산은 생모 폐윤비의 죽음을 알고 난 후에 원한을 삼키지 못하고 복수를 감행했다면, 정조는 생부

사도 폐세자의 죽음을 보고 울음을 삼키며 관용을 생산했다.

연산은 아첨 간신과 놀기 위해 경회루에 배 띄우고 놀았다면, 정조는 초계(抄啓) 문신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부용지에 배를 띄웠다. 연산은 성균관을 폐하고 만세산 인공섬에 흥청망청했다면, 정조는

초계문신들을 아끼면서 하루도 가만히 둔적이 없었다. 연산은 복수하느라 잔혹한 극형으로 살상을

일삼았다면, 정조는 시를 못 지으면 주합루에 유배시키고 계당주(벌주)를 내렸다.

연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사림(士林)의 종자를 쓸어버리겠다고 날뛰던 무모함이 반정으로 끝났

다면, 정조는 화성 축조 정치 개혁과 만인에게 상업의 자유를 준 통공(通共)으로 민생을 북독아 조선

후기 중흥을 이뤘다.


200~500여 년 전 역사의 이야기인데 지금도 강한 상상력이 되살아 난다. 처절하고 감동적이다. 복수

와 관용의 번득이는 역사를 오늘에 되새겨 음미해야 하는 그 무엇이 있다.


후삼국 전쟁에서 후백제를 제패하여 강해진 고려는 신라를 관용으로 포용하고 통일 고려를 완성했다.

공격과 수비의 처참한 살육을 막은 명예 타협은 천년 신라의 인문을 온존 하게 하여 고려 민족 형성에

중추가 되었다. 고구려 발해 유민이 요하 유역에서 남하하여 고려에 귀화하며, 고려~조선 민족으로

정체성이 확립되는데 기여를 하였다.

여진족 제국인 청은 중국 민족을 국정에 참여시키고 포용하여 동양 최대 영토 문화국을 현대 중국에 물렸고,

명치유신의 주도자는 막부와 타협하여 공격과 수비의 살육을 피해 일본의 통일화합으로 선진화의 명예를

얻고 있는데, 청이 명의 유신들을 등용한 것이나, 명치 혁명군이 막부 장군을 보호한 것은 모두, 관용의

원조인 고려가 신라 왕족을 등용한 건국 역사를 본받은 것이다. 복수가 아닌 관용의 성공 사례들이다.


동북아 지정학적 역학 중심에서 살아남은 우리 민족은 중국 대륙과의 천년 영욕의 역사가 말하고 있다.

거란 송 여진과 같은 시기의 고려, 명 청 왜와 같은 시기의 조선이, 자강과 관용의 시기는 평화를 이뤘고,

붕당과 복수의 시기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치욕적 고난을 당했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그 상대에 대한 분노를 어두운 마음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관용한다는 것은

마음속 분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존심까지 내려놓아야 한다. 당연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진심 어린 관용은, 어떤 가혹한 복수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100여 년 전 일제 침략으로 국권을 뺏겼을 때 친일파는 부역하며 사욕을 취했다면, 목숨을 내어 투쟁한

독립 열사의 혈투는 전승국의 도움받아 국권을 회복했다. 외세의 농간으로 분단되어 반목하며 남북은

통일하겠다고 전쟁을 했지만, 죄 없는 백성만 죽이고 분열했다. 자유 민주 국가에서 경제권과 인권의

신장이 우선되는 것도, 관용의 시대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관용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역사의 소명이 우리에게 있다. 주변 4강이 무시하지 못할 때까지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승자의 환희, 패자의 절망이 없다. 그것은 격정을 누르는 역사적 절제이다.

동족상잔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잔인하다. 내전의 후유증은 길다.

 

증오와 원한의 상흔이 오래가기 때문이다.

반역 배신에 대한 응징 처벌은 역사의 경험과 관례일 뿐이다.


길고 긴 70년의 분단 반목과 오해는 역사와 결별하는 대결단을 요구한다.

관용하고 사면한다. 전범과 이념범은 없다." 


이 서사시는 민족 역사의 장엄한 평화의 노래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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