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바로알기/미산 윤의섭
우리나라는 20세기 전반 50년은 일제 침략 수난 시대와 분단의 피를 흘린 약소국으로 막을 내렸고
후반 50년은 각고 노력 총궐기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 달성하여 세계 10강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성장에 바쁜 나머지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민권과 도덕적 정신수준 향상 등 국격에 맞는
올바른 역사인식 함양에 소홀한 점이 남아있다.
1950.6.25.(일) 새벽 38도선 철조망 경계선을 북한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남한을 침공하였다.
그 비극이 60년이 지나도록 정전 협정이라는 종전 아닌 종전 상태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분단으로
말미암은 갈등이 끊이지 않고 겨레를 괴롭히고 있음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러한 엄연한 진실을 북한이 정치성을 띠며 남한이 미군의 힘과 연합하여 북한을 침공하였다고
주장하고, 북측이 왜곡하는 북침설을 남한 내의 일부 지식인들이 동정 동조하고 오도하여 청소년에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우려할 일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이 흘러 공산주의가 소멸하고 국제정치가 재편성되며 미, 러, 중국 등 당시 역사의
비밀 문건이 해제되며 6.25 전후 비밀 들이 속속 드러나고, 6.25 남침설이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6.25 사변 60주년을 맞이하여 북한과 혈맹 관계를 유지하던 중국은 처음으로 남침을 인정했다.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국제선구도보 國際先驅導報와 인민일보의 해외판 환구시보 環球時報
Global Times에 실렸다. 환구시보에 실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1949년 소련과 미국의 점령군이 차례로 철수했다. 한반도 북부는 당시 13만 5천 명의 훈련된 군대가
있었는데 무장이 잘 갖춰졌지만, 한반도 남부는 9만 8천 명의 군경 집단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바로 그날 한국의 부대 가운데 절반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북한군이 조직적으로
기습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한국의 수도 한성(漢城, 서울)을 점령했다."
또 6.25 전야에 소련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이 만주의 중국 편입을 인정하는 대신, 한반도(남쪽 부동항)
를 소련권에 두는 정치적 욕심하에 김일성을 부추겨 남한 공산화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실은 20세기 2차 세계 대전 후 동북아 지정학적 구도가 공산화 확산 정책과
맞물려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한 후 북한 김일성은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군 정병 精兵 3개 사단을 6.25전에
이양받아 남한 침략의 주력군으로 사용한 것이나, 소련의 비행기, 탱크, 대포 등 무기를 지원받아 남한
침략 준비를 한 것이 남침의 증거이다.
사실상 작전계획은 전부 소련의 참모가 세웠다. 북한군은 크든 작든 작전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소련의 병사가 절대 38선을 넘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혹시 체포되어 소련군 참전
했다는 증거(미국이 알지 못하게)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반부에서는 미군 철수 후의 남한의 자유민주 정치와 농지 분배 등 민생에 힘쓰고 있는 평화지대
였다. 당시 남한은 북한의 침략의도를 전연 눈치 채지 못했고, 그날은 6.25 일요일로 주말 외출과 휴가
장병이 많았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탱크와 대포를 앞세우고 무인지경을 내달리듯이 무력을 갖추지 않은 서울에 진입한 것이고 너무 빨리
진입하고 보니, 3일 만에 서울에 도달했고 그들의 후방지원 세력이 쫓아오지 못하여 전방부대가 서울서
3일을 지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춘천으로 남하하던 북한군이 남한 저항군에 막혀 3일을 지체한
것도 남하 작전에 영향을 준것 아닌가 한다.
그것은 후에 남하 속도를 느리게 하여, 미군이 참전을 단행한 스미스 부대가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처음으로 방어 격퇴에 임하여 1950. 7. 5.에 약 6시간에 걸처 저항하여, 미군을 처음 접한 공산군을
주춤거리게 한 전황으로, 결국 남진을 더디게하여 후일 한미군. 연합 반격전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 후 전투부터 비로소 한미 연합군과 공산군의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사전에 준비한 공산군의 남한 침략이라고 할 수 있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6.25동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춘천전투 낙동강전투 인천상륙작전은 모두 반격을 위하여 피 흘린
전투였다. 해마다 7월 5일 이면 오산 죽미령에 있는 유엔 초전기념비단에서 그날을 되새기는 기념식이
한미 관련자들 참석하에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청소년에게는 역사 공부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6.25 동난 중에 유엔군 참전은 통일을 방해한 참전이었다는 억지 논리를 펴는 지식인이 있는데,
그것은 지난 20세기 후반에 저질러진 공산화 무력 침공과 냉전 역사를 간과한 무식의 발로인 역사
왜곡이다. 역사의 교훈에서 얻을 것은, 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힘이 적으면 힘 있는
나라를 친구로 만들 줄 아는 지혜이다.
2013년은 정전 60주년으로 미국에서는 20세기 냉전 기간 공산화 저지를 위하여 참전 동맹한 역사
중에서 월남전 기타 수많은 실패에도 유일하게 한.미동맹 만이 성공사례로 역사에 기리게 되었음을
재평가하고 공산화 격퇴와 자유민주주의 성공사례 그후 민주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모델을
보고 그들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위업으로 여기고 있다.
미국 펜타곤에 한국참전기념 전시관을 개청하고 세계 최강 자유 민주주의 성공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미산의 자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 같은 느티나무 (0) | 2013.09.07 |
---|---|
미래 50년은 한국철도시대 (0) | 2013.07.14 |
기마민족의 자동차산업은 융성한다 (0) | 2013.06.14 |
한국인의 자유민주 정신-21세기의 파도를 헤치다 (0) | 2013.06.09 |
핵은 산업혁명 최후의 실패작이다 (0) | 2013.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