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랴오허·遼河)는 만주 지방 남부 평원을 흐르는 총 길이 1400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이다. 대흥안령산맥 남부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시라 무룬강(西拉木倫)이 라오하강(老哈河)과 합하여 서요하를 이룬다. 서요하는 장백산맥에서 발원한 동요하와 합하여 요하가 되어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요하가 흐르고 있는 요녕성과 내몽골 자치구 남부 지역 일대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기간의 놀라운 고고학적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발해만 요하 일대서 발견된 고대 문화유적
이곳에서 전개된 문명을 ‘홍산(紅山)문화’라 하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일대의 문명을 ‘요하문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협의의 홍산문화는 이 지역 문명유적 중 기원전 45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시대의 문화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학자에 따라서는 홍산문화를 선(先)홍산문화, 협의의 홍산문화, 후(後)홍산문화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문명보다 1000~2000년 이상 앞서는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최고의 신석기 문명까지 포함하며 1908년 일본 학자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1960년대 이후 요하 지역 일대에서 유적 발굴이 본격 착수되면서 수많은 고대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1980년대 들어 우하량 유적 등 협의의 홍산문화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세계 최고(最古)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선홍산문화(신석기 시대)
1. 소하서(小河西)문화(기원전 7000~기원전 6500년)는 1987년 츠펑 시 남부의 현급 도시인 오한기(아오한기·放漢旗)의 수십 곳에서 발굴됐다. 기원전 7000년까지 올라가는 동북 지역 최고(最古)의 신석기 문화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주거지와 생활도구, 무덤, 그리고 동북 지역 최고(最古)의 흙으로 만든 얼굴상(도소인면상)이 발굴됐다.
2. 흥륭와(興隆)문화(기원전 6200~기원전 5200년)는1982년 이래 츠펑 시 오한기 흥륭와촌에서 발굴된 소하서 문화를 잇는 문화 유적이다. 흥륭와 유적에서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집단 주거지가 발굴됐는데 해자까지 두른 대규모 유적으로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이라 명명했다. 최초의 용형상물인 ‘저수룡(猪首龍)’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또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 등 우기가 무덤 등에서 발굴되었는데 이 옥기의 재료가 ‘수암옥’으로 발굴 장소로부터 남동쪽으로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요녕성 수암현에서 나온 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입증됐다. 수암은 고대 한민족 표지 유물인 고인돌이 다수 발견된 곳으로 홍산문화 주인공들의 연결 범위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다.
3. 사해(査海)문화(기원전 5600~기원전 4000년)는1982년 의무려산 동쪽의 요녕성 부신(푸신·阜新)에서 발견돼 지금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석기와 함께 흥륭와 유적지가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발굴됐다. 또 요하 일대에서는 용의 형상물이 꾸준히 발굴되었는데 1994년 사해유적지에서 기원전 5600년경으로 추정되는 돌로 쌓은 용의 형상물인 석소룡(石塑龍)을 발견해 ‘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이라 부른다.
4. 부하(富河)문화(기원전 5200~기원전 5000년)는 1962년 건평 시 북쪽의 시나무룬강 유역인 통료 시 파림좌기 부하 구문에서 발굴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집단 주거지와 함께 빗살무늬 토기 등 토기와 수많은 석기가 발굴됐다. 특히 중국에서 그동안 발굴된 복골(동물뼈를 불에 구워 점을 치던 골복 풍습을 나타내는 유물)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복골이 발견돼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이족의 고유 문화유산인 복골의 원천이 밝혀진 것이다.
5. 조보구(趙寶溝)문화(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는1986년 츠펑 시 오한기 조보구촌에서 발굴된 9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유적이다. 세계 최초의 봉황 모양의 토기가 나와 ‘중화제일봉(中華第一)’이라 명명했다. 여기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세석기 등 동이족이 활약하던 지역의 특징을 나타내는 신석기 유물들이 발굴됐다. 또 그림이 그려진 채도(彩陶)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가 황하 유역의 앙소문화(기원전 4500~2500년) 것보다 이른 시기여서 문명이 요하 지역에서 황하 지역으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요하 지역 채도는 황하문명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곳에서 황하로 이전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조보구 문화의 채도가 ‘서아시아, 중동 지역, 천산과 알타이산 사이→몽골초원→대흥안령 남단 요서 지역’이라는 길을 따라 독자적으로 전래됐을 가능성이 있다. 서아시아 일대의 채도가 앙소문화 지역으로 전래되는 길과는 다른 길이 가능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협의의 홍산문화(홍산문화-동석병용기 시대)
요하문명 유적지는 요하 지역 일대에 산재해 있으나 협의의 홍산문화(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는 내몽골 자치구인 츠펑 시 일대에서 대규모로 발굴됐다. 츠펑 시는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에 위치한 직할시로 면적이 90만 제곱킬로미터(우리나라의 약 9배)에 달하는 방대한 지역이다. 츠펑 시 내 홍산구의 시가지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산이 있는데 바로 홍산(紅山)이다. 홍산문화의 최초 발견지가 츠펑 시에 있어서 이 시기의 문화 유적군이 홍산문화라 지칭되고 있다. 홍산문화는 내몽골 자치구 지역인 츠펑 시와 그 남쪽 요녕성 지역인 조양·능원·건평·객좌 등지에서 다수 발굴됐다. 이중 기념비적인 발굴지가 우하량(뉴허량·牛河梁) 유적지이다.
우하량 홍산유적은 1930년대 중반 당시 만주를 차지했던 일본인들이 발굴을 시작했고 이후 1979년 우하랑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객좌현 동산취(東山嘴) 마을에서 원형제단, 여신상 등 중국 최초의 원시 종교유적과 도기·석기·옥기 등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 동산취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3500년경으로 당시 존재했던 고대 국가의 공적인 제사터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983년부터 1985년 사이에는 조양시 남서쪽의 능원(凌源) 시에 있는 우하량 마을에서 대대적인 유적지 발굴이 이뤄졌다.
이곳에서 제단, 여신묘, 적석총, 피라미드, 돌로 쌓은 사각형 모양의 광장 등 놀라운 고대 문화 유적이 대거 발견됐다. 그 연대는 기원전 3630년(+11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산취 유적보다 더 앞선 시기의 유적이다. 그런데 이 유적들은 계급의 분화와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진 수공업 경제의 존재를 입증하고 고대국가(중국학자들은 古國이라 한다)의 모습을 보여줘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중국 입장에서는 북방 오랑캐인 동이족의 땅에서 중국 국가 역사를 훨씬 앞서 초기 국가 단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후홍산문화(동석병용기 시대-청동기 시대)
1. 고 소하연(小河沿) 문화(기원전 3000~기원전 2000년)는 1874년 오한기의 소하연 마을에서 발굴됐다. 오한기를 비롯한 네이멍구와 요녕성 일대에 넓게 분포된 소하연 문화는 후(後)홍산문화로 분류되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잇는 동석병용기 시대의 유적으로 협의의 홍산문화와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 문화 시대를 연결하는 무덤 양식이다. 이곳에서는 농경 시대의 주거지, 토기, 동물상 등이 발굴됐고 후대 동이족의 나라 상나라 갑골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원시상형문자가 등장했다.
2. 하가점하층 문화(기원전 2000~기원전 1500년)는 요하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전기문화로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의 하가점촌에서 최초로 발견돼 그 지역 이름이 붙여졌다. 하가점하층 문화는 홍산문화-소하연 문화를 잇는 청동기시대 문화로 연산(燕山) 남북의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북쪽으로 시라무강, 동쪽으로는 의무려산 서부, 서쪽으로는 하북성 일부까지, 남쪽으로는 발해만까지 분포한다. 하가점하층 문화는 조양시에서 가장 많이 발굴됐는데 유적지가 1300여 곳이라 한다.
하가점하층 문화 지역 중 연산 이북 지역에서는 하가점상층 문화가 새로이 형성되는데, 기원전 1500~300년경 문화 유적이다. 이들은 북방 기마유목민들의 청동기시대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가점하층 문화 유적지에서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됐으며 특히 한민족의 표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돌무덤, 비파형 동검, 복골 등이 발굴돼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과의 연결 관계가 주목되었다. 홍산문화 유적지에 대해서는 추후 홍산문화 답사 기행 편에서 좀 더 상세히 소개하겠다.
홍산문화와 한민족 고대사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은 이 문화를 일구어낸 사람들이 한민족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굴되는 수많은 유적·유물의 특징, 연대, 유적지의 지정학적 위치 등에 비춰 이곳에서 형성된 고대 문화는 중국의 고대 문화와는 다른 만주와 한반도로 연결되는 문화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흥륭와 유적에서 발굴된 옥귀걸이 등 옥유물은 한반도와 연결된다. 흥륭와 문화의 옥유물 재료는 수암현에서 온 것인데 수암은 흥륭와 유적지에서 남동쪽으로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압록강에서는 서쪽으로 불과 130킬로미터 떨어졌다. 이것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예맥족이 살던 땅 요동 지역과 연결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종호 박사는 “뉴허랑 지역 신비의 왕국에서 발견된 결상이식과 같은 형태의 옥귀걸이가 한반도 중부인 강원도를 비롯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당대의 홍산문화가 한반도 전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의 단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결국 흥륭와 문화 시기와 같거나 앞선 시기에 동해안 문암리와 남해안 안도패총에서도 비슷한 옥귀걸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문암리 것은 중국 장강유역이나 일본 열도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앞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6000년경에는 요서, 요동, 연해주, 한반도가 동일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흥륭와 유적 등에서 요하 일대는 빗살무늬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우실하 교수는 이에 대해 “빗살무니 토기와 세석기는 요하 일대 신석기 문화에서는 대부분 보이는 것이지만, 황하 일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북방 문화 계통이다. 흥륭와의 주도 세력들은 중원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기본적으로 빗살무늬 토기가 전파되는 길로 이동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기원전 6000년 당시부터 이미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 일대를 엮는 발해만 연안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후대의 예·맥족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호 박사는 요하 지역의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 “큰 틀에서 랴오허 지역 일대는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하층 문화-고조선 문화로 이어지는 데 이들 지역의 기본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다. 반면에 중국의 도기는 채도(彩陶)에서 흑도(黑陶),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돼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말했다. 부하문화에서 발굴된 복골도 동이족의 전유물인 골복의 전통을 보여준다. 이 전통은 후에 동이족의 나라 상(은)나라로 이어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실하 교수는 “요서 지역에서 시작된 골복의 전통은 한반도의 백두대간 동쪽을 타고 내려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서도 많이 보인다. 이 골복 문화도 결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가 동일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김정학은 복골의 전통이 주로 북방 아시아족에 기원한다는 점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복골(卜骨)은 북중국과 만주 지방에서 많이 발견돼 주목할 만한데, 이들 지방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수렵·방목을 주 생업으로 한 북방 아시아족이 살고 있었다. 동물의 뼈, 특히 견갑골(肩胛骨)에 금을 내 점복 하는 습속은 이들 수렵·유목을 주로 한 북방 아시아족에서 기원한 것을 시사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하량 유적지 등 요하 일대에서는 다수의 적석총이 발굴되었는데 적석총은 요하 일대와 만주·한반도에서 나타나는 고대 무덤 양식으로 중국과는 전혀 다른 묘제다. 중국은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드는 토광묘가 주류이며 역사 시대 이후에야 목관묘가 널리 사용되었다 한다. 고대로부터 무덤 양식은 오랜 기간 변하지 않고 고유의 전통이 지켜진다고 한다. 따라서 무덤 양식으로 민족의 이동 경로나 삶의 영역을 유추해볼 수 있다. 적석총은 요하 지역과 만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나타나는 한민족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으로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적석총을 조성했는데 백제 초기에도 적석총이 이어졌다.
하가점하층 문화 유적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돌무덤, 비파형 동검 등 잘 알려진 한민족 고유의 고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치(稚)를 가진 석성도 발견되었는데 이 또한 고대로부터 이어온 한민족 고유의 축성방법이다. 수많은 고구려성에서 나타나고 백제의 계양산성에도 나타나는 이 축성기술은 하가점하층 문화에서 등장해 고구려까지 이어지지만, 같은 시기의 중원 지역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비파형 동검과 관련해서 이종호 박사는 “청동단검은 당시 적과의 육박전에 사용된 주된 무기로 통치 권력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비파형 동검이 발견된 지역은 큰 틀에서 홍산문화의 영역에 들어간다. 따라서 홍산인들이 홍산인들의 국가 즉, 신비의 왕국을 건설했고 이어서 단군을 시조로 하는 고조선이 성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약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하가점상층 문화는 기원전 1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의 문화로, 기마유목민들의 초원 문화 유적이 나타나며 중국에서는 동호(東胡)의 문화라 하는데 이 ’동호‘ 역시 앞서 기술한 대로 고조선의 다른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
이같이 홍산문화는 지역적 위치, 유물 내용, 연대 등에서 한민족 고유의 문화와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다. 특히 우하량 유적은 고조선이 존재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고조선 성립 훨씬 이전에 초기 단계의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고조선보다 무려1200년 앞서는 기원전 3500년경의 초기 단계 고대국가의 흔적이 발굴된 것이다. 이 초기 국가에 대해 중국 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그동안 중국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오랫동안 북방 오랑캐의 땅이며 문명이 소외된 지역이라고 봐왔고 문화적인 연결고리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앞서 설명한 대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왔다. 요하 일대에서 발굴된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실증적 연구도 있다. 유 엠 부진을 비롯한 학자들이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중립적으로 연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요하 일대는 바로 고조선 지역이다. 홍산문화의 대 발견은 한민족 고대사 연구에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앞으로 관련된 고고학·역사학·인류학 등 모든 과학적 분야를 동원해 연구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홍산·단군이 중국 역사’라는 몰염치
중국은 그동안 황하 유역인 중원 지역에서 발흥한 황하 문명을 모태로 중국 문명이 형성돼 왔다. 중국의 국가 기원은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경으로 봤다. 그런데 우하량 유적지가 발굴되자 이 지역에 기원전 3500년경에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기초로 세계 최고의 문명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며 중국 역사를 ‘중화 5000년’으로 갑자기 늘렸다. 그동안 한민족 표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적석총,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였고 오랫동안 동이족의 지역으로 치부해온 땅인 요하 지역에서 나타난 고대문명을 중국 역사로 편입했다. 그동안 중국 역사에서 제외했던 이민족의 역사가 중국 역사로 뒤바뀐 것이다.
우하량 등 홍산문화 유적의 대 발견 후 중국은 역사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전환해 그동안의 ‘황하 중심 문명론’에서 벗어나 ‘다중심 문화 발전론’을 전개했다. 요약하면 황하 문명보다 훨씬 이른 홍산문화가 중국 문명의 시발점이며 다른 지역의 고대 문화와 함께 중국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그동안 신화로 취급되던 삼황오제(기원전 4000~3500년경)와 황제 염제·치우제의 삼시조가 역사에 편입되고 황제와 치우가 싸운 탁록대전도 기원전 2700년경의 역사적 사실이 된다. 또 지금의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인물인 단군 웅녀 주몽과 이들로부터 비롯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의 고대사는 당연히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홍산문화 유적이 발굴된 이후 역사관에 변화가 생긴 중국은 원래 황제의 후예라고 해왔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염제를 포함한 염·황후예라 했다. 그런데 1983~1985년 우하량 유적 발굴 후에는 입장을 크게 바꾼다. 그동안 오랑캐인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치부해왔던 치우를 중국의 조상으로 영입했다. 베이징에서 16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탁록현에 1994~1998년 중에 ‘귀근원’이란 절을 세우고 ‘중화삼조당’이란 사당을 지어 중국인들의 조상은 황제 염제 치우를 모두 포함한 삼시조라 선언한다. 이제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황하문명에 앞서고 있으며 우하량 유적에는 기원전 3500년경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중국 내 일어난 모든 문화가 중국문화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이것이 중국의 역사 공정의 주된 내용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백수이(白壽葬)가 쓴 <중국통사강요>에서 중국의 이러한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하나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다. 중국 역사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경 내의 각 민족이 공동으로 창조한 역사로 과거에 광대한 중국 영토에서 생존·번영했으나 지금은 소멸된 민족의 역사도 중국 역사다.”
중국의 역사 공정은 인적·물적 자원을 대거 투입하여 시대별·지역별로 조직적이고 주도면밀하게 진행돼왔다.
1. ‘하상주 단대공정’은 1996~2000년 기간 그동안 선사시대로 취급하던 전설적인 하·상·주 시대에 대한 연구 작업이다. 연구 결과 하(夏)는 기원전 2070~1600년, 상(商)은 기원전 1600~1046년, 주(周)는 기원전 1046~771년까지 실존했던 나라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요하 지역에 단군조선 시대의 역사가 전개되던 시기다.
2. ‘중화문명탐원공정’은 2001~2006년 기간 진행됐는데 중국 문명의 기원이 황하문명이 아니라 요하 일대의 홍산문명에서 비롯되며 홍산문명은 세계 4대 문명권보다 앞서는 문명권으로 존재했다는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3. ‘동북·서북·서남공정’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중국의 분열을 방지하고 하나의 큰 역사의 틀에 묶어놓는 역사공정이다. 중국의 동북삼성(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 소수민족인 위구르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신장 웨이우얼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북공정’, 소수민족인 티베트인들이 오래 역사를 유지해왔던 티베트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남공정’이 그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