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3~4세기 日 진출한 가야…해협 사이에 두고 원격통치 가능성
입력2019.12.27
(14) 양안(兩岸)국가 가야
대한해협 건너간 가야
4국 해양 경쟁시대
일본 속 가야의 흔적
대한해협 건너간 가야
4국 해양 경쟁시대
일본 속 가야의 흔적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시 상도고분에서 발견된 6세기께 황금장식 마구들과 복원된 기마호족상. 당시 일본 야마토 조정이 이 지역 호족에게 전해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즈모 지역은 가야인과 신라인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한 집단의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간혹 회복될 수도 있다. 반면 외부 충격(침략)을 받으면 멸망에 이르기 쉽고, 재활하기 힘들다. 가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했기 때문에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우수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제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성격을 반영하는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 만들어졌는데, 부장품들은 주로 가야와 연관됐다. 4국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해양 경쟁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 말투구
일본 열도에서 새로 축조되는 전방후원분들은 더욱 커지고, 내부도 횡혈식으로 바뀌면서 철제무기와 마구들, 금은 세공품들이 매장됐다. 2600여 기가 남은 전방후원분 분포를 보면 대략 4~5개 지역에 집중됐다. 또한 5세기 후반에 ‘기히(吉備)의 난’, 6세기 전반 규슈에서 ‘이와이(磐井)의 난’이 각각 일어났다. 이런 현상은 통일되기 이전에 4~5개의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으며, 중심은 관서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왜 세력들은 백제와 무역 및 인적·문화적 교류가 빈번했고, 사료에서 보이듯 정치·군사적으로도 관련이 깊었다. 또 ‘왜국’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일부는 전남의 전방후원분들에서 나타나듯 한반도 남부에도 진출했다.
고령 대가야 박물관에 재현된 제철로
이런 복잡한 시대 상황과 왜와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몇 가지 있다. 임나일본부설(일제강점기 일본학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에가미 나미오), 부여계 기마인들의 진출설(존 코벨), 일본 열도 내 삼한 분국설(북한의 김석형), 백제 진출설(신채호, 문정창), 전남의 전방후원분으로 인한 새로운 설들이 있다(박천수). 소위 ‘기마민족설’은 4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기마민족이 북규슈로 이동한 후 임나까지 포함해 ‘왜·한 연합왕국’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왕이 북규슈에 본거지를 두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권을 주도한다는 논리이므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는 한계가 있다.(천관우)
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해를 왕복하면서 그리스의 폴리스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등이 바다를 사이에 둔 ‘양안(兩岸) 국가’ 또는 식민 모국(母國)과 자국(子國)의 2중 체제였음을 깨달았다. 또한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스페인의 ‘지브롤터’는 영국 영토이고, 반대로 아프리카의 ‘세우타’는 스페인 영토라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렇다면 가야는 원격통치를 하는 양안 국가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열도에 오랫동안 진출하면서 교류했고, 대한해협은 교통과 통신이 가능할 정도로 짧은 거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열도 북부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건국신화 등은 이런 상황을 뒷받침한다.
가야계의 일본 고대국가 형성
가야국의 무역 상품이었던 야광 조개국자(고령 대가야 박물관)
이 신화는 기본 줄거리가 단군신화와 김수로왕 신화처럼 천손강림 신화다. 내용은 물론이고 붉은 천에 쌓여 내려온 지명도 거의 비슷하다(구시후루는 구지봉과 음이 비슷함). 이 때문에 가야계 집단이 일본 열도에 도착해 고대국가를 형성한 과정으로 해석한다. 물론 정치력이나 군사력, 그리고 국제질서를 고려하면 주체는 원가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주체는 당시 상황을 모호하게 서술함으로써 종속적이었던 왜 집단을 주체인 것처럼 해석하는 ‘임나일본부설’과 ‘기마민족국가설’을 낳게 만들었다(천관우). 가야계 지명은 지금도 쓰시마(대마도)나 규슈 북부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천손을 모시는 기리시마 신궁 근처에는 ‘가라구니다케(韓國岳)’가 있다. 고대부터 항해자들이 처음 도착하는 규슈 북부에는 ‘가라의 항구’라는 뜻인 ‘가라쓰’가 있는데, 원래는 ‘한진(韓津)’으로 사용했으나 14세기부터 ‘당진(唐津)’으로 바꿔 버렸다. 6세기 중반에 가까워지면서 대형 배의 건조술과 원거리 항해술이 발달하고, 신라와 백제에 이어 고구려가 일본 열도에 적극 진출했다. 위상이 약해진 가야연맹은 망국에 가까운 국난을 겪고도 통일에 실패한 채 지탱하다 신라에 각개 격파되고, 남은 대가야도 562년에 멸망했다. 그 결과 한때 남해의 양안을 통치한 해양왕국 가야는 500년 역사를 기록조차 제대로 못 남겼고, 일부만 일본 역사 속에 남겨 두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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