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내는 자, 성을 쌓는 자
입력2019.04.18
고두현 논설위원
로마는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촘촘한 도로망으로 연결했다. 서기 200년 무렵에는 도로 총연장이 32만㎞나 됐다. 중간에는 12~20㎞ 간격으로 숙박 시설을 갖춘 역참을 설치해 말이나 수레를 바꿔 탈 수 있게 했다. 그 덕분에 하루에 70㎞, 급할 때는 200㎞까지 우편물을 전달할 수 있었다. 군대의 진격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네로 황제의 죽음을 스페인까지 알린 전령은 36시간 만에 540㎞를 주파했다.
로마뿐만이 아니다. 1300여 년 전 북방 초원을 석권한 돌궐제국의 명장 투뉴쿠크는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으로 이어졌다. 몽골의 역참제도는 로마의 도로망과 닮았다. 30~40㎞마다 거점을 둬 정보와 물자를 신속하게 전했다.
성(城)에 의존한 나라들의 운명은 달랐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지 15년 만에 멸망했다. 성은 외적이 아니라 내부의 배반으로 무너지기도 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스스로 갇혔다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
성은 벽과 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안전할 것 같지만 철저하게 닫힌 세계다. 축성(築城)의 목적이 수성(守城)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닫힌 城'에선 소통·번영 못 이뤄
길은 외부를 향해 적극적으로 열린 세계다. 길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던 로마와 돌궐·몽골, 그리고 조선의 사정은 어땠는가. 조선에는 도로라고 할 만한 길이 거의 없었다. 전쟁 때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통로라며 일부러 길을 닫았다. 도로가 빈약하니 물자를 수송할 수레가 다닐 수 없었다. 물류가 막히니 상업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18세기 실학자 박지원과 박제가 등이 “나라가 가난한 건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까닭”이라며 실사구시를 주창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20세기 들어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물류 혈맥이 뚫린 덕분에 근대화가 이뤄졌다. 수레도 없던 나라가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한국 경제의 성장 역사는 폐쇄적인 성의 울타리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길을 닦은 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치 분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진영끼리 모여 성을 쌓고 전근대적인 공성전(攻城戰)을 벌이기 일쑤다. 틈만 나면 조우전(遭遇戰)까지 벌이고 있다. 네 편, 내 편 나눠 싸우는 ‘닫힌 사회’에서는 길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성에 갇혀 스스로 벽이 되고 만다. 나라 안팎이 어려운 요즘 ‘열린 길’과 ‘닫힌 성’의 의미를 새삼 되새긴다. 벽을 밀면 문이 되고, 문을 열면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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