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4.10 (요하문명 답사 2일째) 흥륭와 문화와 조보구 문화

새밀 2019. 3. 3. 11:52

4.10 (요하문명 답사 2일째) 흥륭와 문화와 조보구 문화

수행팀 글 | 2016.04.11 15:06:10 올림 | 22,475 읽음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8,000년 전의 역사 유적지를 찾아갔습니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차오마오산, 대전자유적, 흥륭와유적, 흥륭구유적, 오한기박물관, 조보구유적까지 여섯 군데를 답사했습니다. 

 

드디어 요녕성에서 내몽고자치구로 넘어왔습니다. 특히 오늘은 홍산문화 이전의 요하 지역 주요 신석기문화 발굴 유적지를 찾아가 보았는데, 짧게는 4,000년 전으로부터 길게는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는 여정이었습니다. 

 

어제밤 조양시에서 하룻밤을 묵은 스님은 새벽 5시 30분에 숙소를 나와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찾아갈 곳은 사가자진에 위치한 차오마오산 유적입니다. 도로 위를 한참 달리는 도중 “드디어 내몽고자치주로 접어들었다”고 조춘호 선생님이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도 “옛 선조들이 살았던 곳에 오니 기운이 좀 나요?” 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 내몽고자치구

 

내몽고자치구는 건조한 사막 기후를 나타내는 곳입니다. 조 선생님이 “왜 이런 척박한 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일까요?”라고 묻자 스님이 답했습니다. 

 

“원시인들은 기껏 해봐야 돌칼, 돌도끼 밖에 사용을 못하니까 풀을 벨 수는 있어도 나무를 베지는 못했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건조 지대에서 정착해 살았던 거야. 하지만 철기문명이 발달하면서 나무를 벨 수 있게 되자 그 때부터 온대 산림지대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지.”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6시 30분에 사가자진에 도착했습니다. 이 근처에 차오마오산유적이 있다고 하지만 길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동네 촌부에게 묻고, 또 묻고 하면서 겨우겨우 차오마오산 아래에 다달았습니다. 

 


 


▲ 차오마오산을 찾을 때까지 대여섯 명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이 길로 주욱 올라가면 유적이 있다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들은 후 스님은 설레는 마음으로 숨가쁘게 뛰었습니다. 드디어 ‘차오마오산유적’ 이라는 비석을 발견, 기쁜 마음으로 비석에 쓰여진 설명 문구를 차분히 읽어 보았습니다. 

 


▲ 차오마오산유적

 

설명 문구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 ‘제단과 무덤’이 결합된 홍산문화의 의례 건축물 유구가 이곳에서 발견되었고, 이는 원시종교와 장례풍습, 그리고 제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새로운 자료라고 합니다. 즉 이것은 홍산문화 시기의 적석총인 것입니다. 

 


▲ ‘5,500년 전’ 이라고 적힌 부분을 가리키고 있는 스님.  

 

발굴 자료에 의하면 석관묘 7기, 제단 1기, 돌로 만든 여신상 4점, 남성생식기 모양의 돌인형, 뼈로 만든 피리가 수습되었고, 돌로 만들어진 4점의 여신상 가운데 사람의 얼굴보다 큰 것도 있었고, 10센티미터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 차오마오산에서 수습된 인물상

 

발굴지에는 정말로 석관묘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석관묘 속에 들어가 직접 누워보면서 그 크기를 짐작해 보았는데, 스님의 호기심 가득한 열정적인 모습에 조춘호 선생님도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 석관묘 앞에는 불에 탄 붉은 흙이 두껍게 쌓여 있었는데, 이것은 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증거로서, 이 적석총 안에 누워 있던 사람이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어제는 8000년 전 동이의 본향인 사해마을을 찾아갔다면 오늘 아침에는 이제 홍산문화의 땅 차오마오산에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차오마오산을 내려온 스님은 다음으로 ‘대전자유적’으로 향했습니다. 대전자유적은 약 3450년~3700년 전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즉 청동기 시대인 하가점 하층문화에 속하는 유적인 셈이고, 이는 우리의 고조선 문화로 바로 이어지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하가점 하층문화라는 것은 이 시대의 유물이 최초로 출토된 곳이 ‘하가점’이라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와 동시대의 유물은 비록 출토된 장소가 다르다 하더라도 모두 ‘하가점문화’ 라고 부르는데, 이를 다시 발굴된 지층에 따라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어 부른다고 합니다.

 


▲ 대전자유적

 

이곳 대전자유적에서는 치를 갖춘 석성과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토기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석성이 있었던 자리에는 비석 두 개가 반듯이 세워져 이곳이 유적지임을 알려주었고, 석성이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더 가면 엄청난 양의 무덤들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석성 입구에는 발굴된 토기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토기에 발이 세 개씩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발굴지 주위를 천천히 걷다 보니 빗살무늬가 새겨진 부서진 토기 조각들과 토기의 삼발이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끝이 뾰족한 조각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발길에 채이는 것들이 대부분 3500년 이상 된 유물인 것입니다. 

 


▲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토기 조각들

 


▲ 오한기 박불관에 전시된 발이 세 개 달린 토기들

 

스님은 그림으로 그려진 토기를 가리키며 토기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대전자유적 답사를 마치고 나서는 드디어 흥륭와(싱룽와)유적을 찾아 갔습니다. 흥륭와유적은 뉴허랑유적 다음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곳입니다. 

 

아침 9시 30분 무렵에 보국토향에 도착했습니다. 보국토향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흥륭와유적이 나오고, 왼쪽 길로 접어들면 흥륭구(싱룽구)유적이 나옵니다. 먼저 흥륭와유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스님이 몇 해 전에 답사를 왔을 때는 모두 비포장 도로였고, 초행길이라 이곳을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도로가 모두 포장되어 있고, 이곳을 다녀간 기억 덕분에 쉽게 흥륭와유적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흥륭와유적으로 가는 잘 포장된 도로. 

 

흥륭와유적 입구에는 ‘중화 제1촌’이라고 간판과 ‘중화 시조 취락’ 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집단 주거지, 가장 오래된 옥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어제 갔었던 사해마을이 원래 중화 제1촌이었다가 다시 이곳이 중화 제1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8200년 전의 흥륭와유적

 


▲ 흥륭와 유적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

 

이곳 흥륭와 유적 안으로 들어가니 대규모 주택 단지를 방불케 했습니다. 여기가 동이족이 문명의 새벽을 연 곳이라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1982년에 발굴된 흥륭와 유적은 중국 100대 고고학 발굴에 포함될 만큼 중요한 유적입니다. 무려 175기의 주거지가 마치 도시계획으로 조성한 주택단지처럼 드러났고, 가장 넓고 보존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의 규모는 보통 18평 정도인데 가장 큰 두 곳은 넓이가 42평을 훌쩍 넘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마을 한복판에 있는 이 두 곳을 영도자의 거주지로 간주하기도 하고, 회의나 원시종교의식을 거행했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8,000년 전의 마을에 벌써 두 개의 씨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가장 규모가 큰 집터

 

각 방에는 취사용구는 물론 생산도구와 식품저장용 움막까지 있었는데, 이것은 가정마다 경제적으로 독립해 있었다는 얘기이고, 4~5명이 한 가정을 이루어 살았다고 가정할 때 이 원시 마을에는 300여 명이 살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 흥륭구 유적의 발굴 모습과 출토된 유물(오한기박물관)

 

그리고 20여 곳의 집자리에서 무덤 20여 기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무덤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 외에도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해 사람과 돼지를 합장한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순장이라고 한다면 동이족의 순장도 여기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고, 또 이것은 8,000년 전부터 돼지가 제수용품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도 합니다. 또 돼지 사육과 돼지 숭배는 원시농업의 시작을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 때문에 흥륭와 사람들은 농업을 갓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유물은 오후에 오한기박물관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사람과 돼지를 합장한 흔적(오한기 박물관)

 

또 이렇게 4만 제곱미터나 되는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취락은 환호(적의 침입을 막으려 도랑으로 두른 것)로 보호되어 있기까지 했습니다.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환호

 

이렇게 8,000년 전 선조들을 흔적과 숨결을 느껴본 후 다음은 흥륭구유적을 찾아갔습니다. 역시나 시골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가며 산 속으로 난 비포장 길을 1시간 가량 찾아 헤맨 끝에 겨우 유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흥륭구유적

 

비석에는 이곳에서 7,800년 전의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헉’ 하고 놀랄 따름이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고대유물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3000년, 4000년 전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7,800년이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 토기의 한 부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조각

 


▲ 흥륭구유적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빗살무니 토기

 

비석이 있는 곳은 발굴이 끝나서 다시 평지로 복원이 되어 있었지만, 스님은 다시 저 뒤쪽으로 산책 삼아 걸어가 보자고 했습니다. 계곡을 하나 건너니 다시 너른 밭이 나타났고, 이곳 밭에서도 아주 쉽게 토기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오한기박물관에 가서 관장님에게 물어보니 아직 이 지역은 발굴이 되지 않은 상태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마 여기도 곧 발굴이 시작되면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출토될 것입니다. 

 


 

흥륭구 유적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는 언덕 위에 움막집이 번듯하게 지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서 올라가 보니 움막 앞에 ‘중화 시조 출토 유지’ 라고 적힌 비석이 있었습니다. 

 


▲ 중화시조유지

 

문이 닫혀 있어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오한기박물관 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여기서 가장 오래된 인물상 조각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여기고 이렇게 전시관을 만든 것입니다.

 


 

또 이 유적은 6500년 전 홍산문화시대의 유물이라고 합니다. 계곡 하나를 두고 양쪽 언덕에서 하나는 7800년 전 흥륭와문화의 유물이, 이곳은 6500년 전 홍산문화 유물이 발견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중화시조유지까지 둘러본 후 오한기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오한기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오한기박물관입니다. 

 


▲ 오한기박물관

 

박물관에는 요하지역에서 발굴된 주요 신석기문화 유적을 연대순으로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 내몽고 자치구 내에 발견된 요하문명 유적지를 표시해 둔 모형

 

가장 오래된 소하서문화(9000년 전)를 비롯해 흥륭와문화(8200년 전), 조보구문화(7000년 전), 소하연문화(5000년 전) 유물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며 이미 답사한 지역과 내일 답사할 지역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보았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이곳 관장님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곳 내몽고 자치주에서는 요하문명과 관련된 유적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고, 어느 정도까지 발굴이 진척되었는지, 각 유적지의 위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오한기박물관 관장님

 

관장님은 오늘 7월에 한국을 방문하는데 스님은 그 때 식사 대접이라도 하겠다며 감사 인사를 한 후 박물관을 나왔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답사 코스로 향했습니다. 오한기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조보구유적지를 찾아갔습니다. 조보구유적지는 스님도 처음 가보는 것이라 길을 잘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보통 처음 방문하는 곳은 찾기가 너무 어려워 몇 시간을 헤매야 하기 때문입니다. 

 


▲ 조보구유적을 찾기 위해 마을 촌부에게 길을 물어보는 중

 

마을 촌부들의 설명에 따르면 저 산 너머에 조보구유적이 있다고 했는데, 산을 넘어가서 한참을 지났는데도 유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상 부위에 비석이 있기에 허겁지겁 뛰어올라갔지만 유적지가 아니었습니다. 해는 저물고 있는데 어떡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마을로 내려가서 마을 사람 한 명을 앞세우고 다시 올라와야 하나’ 하고 산을 내려오려던 찰나에 우연히 유적지 표시물을 발견했습니다. 스님은 “하마터면 내일 다시 올 뻔 했는데, 정말 잘 되었다” 며 아주 기뻐했습니다. 

 


▲ 해가 질 무렵 겨우 발견한 조보구유적. 최근에 세워진 비석

 

조보구유적에서는 중국인들에게서 ‘중화 제1봉’으로 명명된 최초의 봉황토기와 그림이 그려진 토기인 채도가 출토되었습니다. 봉황 형태의 도안들은 조보구에서 출토된 채색토기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 최근에 새워진 비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원래 비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산 위에 사람들이 주거했다는 사실이 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높은 산 위에 유적이 발견된 것을 보고 “아마도 죽은 사람을 이곳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까 싶다” 면서 “사람이 죽으면 하늘 나라에 쉽게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 산 위에서 제사를 지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역사학자들이 밝혀야 하겠지요. 

 

조보구유적까지 모두 둘러본 후 해가 지기 전인 저녁 6시가 되어 산을 내려왔습니다. 다시 오한기 시내로 접어들어 숙소를 잡은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저녁에는 조춘호 선생님, 운전을 해준 기사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지금 답사하고 있는 요하문명 유적지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운전기사 분이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운전기사님은 중국분이신데, 스님은 기사님의 질문에 친절히 답을 해주었습니다. 

 


 

“연대는 어떻게 추정할 수 있었으며, 누가 추정했으며 조작의 가능성은 없는지요?”

 

“과학시간에 배우는 화학 원소 중에 탄소(C)가 있어요.  탄소는 원자번호가 6번이고 원자량이 12인데 원자량 14짜리인 탄소가 있어요. 이 탄소동위원소가 세월이 지나면 붕괴가 되는데 그 반감기를 이용해서 연대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흙이나 뼈에 든 탄소를 가지고 측정하면 대강 이게 몇 천 년 전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오차범위가 많으면 100년 정도 되긴 하지만, 탄소동위원소를 가지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추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 결과를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실험을 누가 했느냐 하면 중국의 과학자들입니다. 행여 조작을 한다 해도 가져가서 실험해보면 금방 나오기 때문에 조작하기 어려워요. 그런 과학적인 검사가 없었다면 이런 곳에 그렇게 오래된 문명이 있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을 못 했을 거예요.”

 

“그 결과를 혹시 세계에서 인정해 주는가요?”

  

“아니오. 아직 아닙니다. 제일 처음 발견한 건 1908년 청나라 때입니다. 일본인 학자가 여기 적봉에 왔다가 홍산에서 유물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 이름 붙인 거예요. 

 

그걸 가지고 중국 학자들이 연구를 했어요. 청나라 말 유명한 개혁자 양계초(梁啓超)의 아들이 고고학자인데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1931년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만주를 일본에 빼앗기는 바람에 중국인들의 연구가 중단됐어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처음에는 살기가 어려워서 연구를 못 하다가 1970년대부터 여유가 생기자 발굴과 연구도 재개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연대 측정을 해 보니까 너무 오래된 문명이라서 중국인들도 놀랐어요. 

 

중국은 황하문명을 중국의 뿌리로 삼아왔고, 또 중국에서는 이곳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의 땅이라고 해서 중국역사로 보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홍산문화가 그들이 말하는 오랑캐 땅에서 나온데다가 황하문명보다 1,000년 내지 2,000년이나 앞서니까 이게 정치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발견은 했는데 공개를 못 하다가 1990년도 후반에 중국 정부는 정치문제를 고려해서 ‘황하문명과 요하문명, 이 둘이 중국문명의 뿌리다’라고 최종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맞춘 후에 세상에 공개를 한 겁니다. 이게 ‘동북공정(東北工程)’이에요.

 


▲ 세계 4대 문명 보다 앞서는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사실 옛날 것은 누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중국이 ‘황하문명에서 이러저러하게 발전해서 중국이 계승했고, 요하문명은 조선 등 북방 민족에게 계승되다가 현재는 다시 중국 문명의 한 기둥이 됐다’고 설명해도 되는데, 처음부터 이걸 모두 중국 문명이었다고 하려니까 지금 머리가 아픈 거예요. 한국 학자들이 ‘아니다. 그건 조선 문명의 뿌리다’라고 주장하니까 중국은 지금 한국 학자들에게는 탐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을 찾는 문제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인류의 조상이 당연히 백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기들이 2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을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백인들이 식민지로 삼은 아프리카에서 1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나왔고, 나중에는 300만 년 전의 것도 나왔어요. 그러니까 유럽에서 처음에는 ‘어떻게 아프리카의 흑인들, 식민지 노예들이 우리 백인들의 조상이란 말이냐?’며 못 받아들이고 정치 문제가 되었어요. 그래서 그 사실이 국제사회에서 공인되기까지 100년이나 걸린 예가 있습니다. 지금은 현생인류든 옛날 원시인이든 모든 인류의 조상이 다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수에서 발생해서 전 세계로 퍼졌다고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과서에도 다 그렇게 기재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다 옛날 이야기지 지금과는 큰 관계가 없는 이야기예요. 지금의 우리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5,000년, 8,000년 전에 동북에 황하보다 앞선 문명이 있었다는 게 현재의 중국에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인간 비슷한 존재가 출현한 건 약 700만 년 전이라고 추정하고, 현재 발견된 인골 중 가장 오래된 게 300만 년 전의 것입니다. 그런데 현생인류의 조상은 15만 년 전에 출현했습니다. 원숭이와는 구분되는 인간은 다시 원인류(猿人類), 구인류, 현생인류 등으로 나눠지는데, 현생인류는 15만 년 전에 출현했다는 겁니다. 심양박물관에 가보면 28만년 전의 것이라는 인골도 전시되어 있는데, 다 현생인류의 것이 아니고 옛날 인류, 즉 원인의 것입니다. 

 

현생인류가 출현한 건 15만 년 전이지만 원인인 네안데르탈인도 같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4만 년 전까지는 같이 살면서 오히려 네안데르탈인이 더 중심이었는데 4만 년 전쯤 네안데르탈인이 다 죽고 이후부터는 현생인류만 살아남은 거예요.

 

구석기시대에는 돌을 깨서 만든 타제석기를 썼고,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만든 마제석기나 토기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어요. 신석기문화는 최고(最古)를 1만 년 전으로 잡습니다. 내일 가는 소하서유적이 9,000년 됐으니까 아직 공인은 못 받았지만 세계 최고(最古) 문명에 속합니다. 원래는 소아시아, 즉 시리아와 터키 쪽이 세계 최고라고 알려졌는데 그게 8,000년 됐다고 하니까 이쪽이 더 오래됐지요.

 

세계 4대 문명, 즉 이집트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더스문명, 황하문명이 대략 4,500~5,000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홍산문명은 5,500~6,500년 됐으니까 그보다 더 앞선 문명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 8,000년 전의 흥륭와유적은 말할 것도 없고, 무덤도 쌓고 제사도 지내는 등 그보다 아주 발달한 홍산문명조차 세계 4대 문명보다 1,000년을 앞섰습니다. 내일과 모레 누허량에 가면 ‘문명’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신전, 제단, 큰 무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오래 되어 남은 건 많지 않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유적과 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유적지에서 보았던 돌로 깎은 유물도 그래요. 돌이니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사람이 손을 댄지 6,000 내지 7,000년이 된 거예요.

 

그러니 중국이 홍산문화 현장이나 자료를 완전히 공개해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가 있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정치문제를 개입시키지 말고 자유 연구를 통해서 이걸 검증해야 합니다. 아직은 중국이 미국 등에 약간 피해의식이 있지만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긴다면 공개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질문이 더 있었고 깊은 대화가 오갔습니다. 중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 중국의 역사와 풍속을 해박하게 설명해 주는 스님의 지식과 안목에 중국인 운전기사님은 무척 감탄하며 놀라워 했습니다. 조춘호 선생님도 감탄하면서 때로는 박수를 치며 뿌듯해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 밤이었습니다.

 

내일은 이 지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인 소하서유적을 비롯해 성자산 산성유적, 홍산문화가 꽃핀 적봉시 일대를 둘러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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