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③ 촛불의 불씨가 된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론'

새밀 2019. 2. 24. 10:25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③ 촛불의 불씨가 된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론'

 



/사진=임종철 일러스트레이터

    

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것들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10일 오전 11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역사적인 이 문장을 차분하게 읽어 대한민국은 물론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현직 대통령을 ‘국민의 뜻’을 담은 헌법에 의해 파면하고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새누리당과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겠지만 한국 민주화 수준에 전세계가 경악과 동시에 찬사를 보냈다. 한국 국민도 한편으로 놀라고 불안해하면서도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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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물결이 이런 역사를 만들었다. 최순실이라는 사인(私人)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일부 정부부처의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분노가 매주 토요일마다 그 넓은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웠다. 수십만명이 모여 국정정상화를 외치다 해산한 뒤 그들이 머물렀던 광장은 말끔히 청소됐다. 시민들은 한층 높아진 정치문화 의식을 보여줬다. 

◆ 촛불 탄핵의 뿌리는 3.1독립만세운동 

시계바늘을 15년 전으로 돌려보자. 서울 시청광장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이어지는 세종로는 붉은 악마 물결로 넘실거렸다. 뜨거운 열정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다. 개최국 이점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하나 된 에너지, 기에 힘입은 덕분이었다. 한국 국민은 어떻게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 주인의 힘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1919년 3월1일 정오. 대한독립만세(조선독립만세가 아니었다)의 함성이 한반도에 울려퍼졌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한의 정신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일제의 무단통치로 9년 동안 죽어지냈던 대한의 국민들이 이날 한꺼번에 거리에 나와 한마음 한뜻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 사상과 행동에는 둔헌(遯軒) 임병찬 의병장이 있었다. 그는 광무황제와 융희황제로부터 1913년 초에 의병을 모아 항일투쟁에 나서라는 ‘거의밀지’를 받았다. 그해 11월, 그는 일제와 싸우는 방법론을 담은 <管見(관견)>을 썼다.

관견의 핵심 내용은 문(文)으로 무(武)를 이긴다는 이문제무(以文制武)의 ‘비폭력 정치투쟁’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혜와 사랑(智仁)에 바탕한 문력투쟁으로 무력으로는 사실상 대항할 수 없었던 일제를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가장 현실적 투쟁방법임을 알 수 있다.

당시 13부에 관찰사 1명과 도약장 1명을 임명하고 340군에는 군수 1명과 군약장 1명씩 임명한다. 각 도 관찰사와 각 군수들이 한날한시에 ‘한국의 독립권 반환과 일본 군대의 철병퇴거를 요구하는 문서’를 일제의 지역책임자에게 제출한다. 하루 비슷한 시간에 전국 360여곳 책임자가 총독부에 처리방안을 문의하느라 전화하면 총독부 관리들은 대경실색할 것이다. 340군에서 한날한시에 움직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일본에 사는 일인들은 물론 외국 열강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임병찬은 투서운동의 궁극 목표가 모든 대한인의 ‘거국합력적 용동’, 즉 ‘거족적 총궐기’임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꼴꾼 나무꾼 무리(추요지도, 蒭蕘之徒)라도 용동(聳動)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리니 이와 같이 된 후에 별도로 수단을 써서 거국합력하면 바라건대 흥복(광복)의 희망이 있으리라”(임병찬, <관견>, 의병항쟁사(둔헌유고), 118쪽). 

그의 ‘비폭력적 민족총궐기 정치투쟁론’ 또는 ‘거족적 문력투쟁론’은 광무황제의 윤허를 받아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 본격적인 정치투쟁에 나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914년 5월23일(양력 6월16일), 조직원 김창식이 일본 경찰에 갑자기 검거되면서 조직이 노출됐다. 이로 인해 임병찬도 체포돼 거문도로 유배 가서 1916년 5월23일 순국했다.   

◆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 촛불물결로 

그럼에도 그의 ‘비폭력 정치투쟁’ 사상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선구적 형태’로서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은 1919년 4월11일, 상해임시정부를 세워 항일투쟁을 이끄는 구심적 역할을 한 원동력이 됐다. 나아가 1919년 5월4일 중국에서 일어난 비폭력 항일운동인 ‘5·4운동’과 2차 세계대전 직후 간디의 대영 비폭력투쟁인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에도 영향을 미쳤다.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론은 그동안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 속에서 살아나 가장 앞선 수준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토대가 됐다. 1987년 6·10 항쟁으로 마련한 현행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3·1독립만세운동이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가 됐다는 것을 명문화한 것이다.  

모든 사상은 스스로 처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고유한 전통요소와 다른 나라의 앞선 요소를 적절하게 짜깁기(패치워크)해 형성되고 발전한다. 임병찬의 ‘비폭력 정치투쟁’론은 강한 군사력을 가진 일제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뺏긴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싹텄다.

그것은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통해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서경(書經)>의 말처럼 ‘민심을 통해 우리가 독립할 때가 됐다는 천시(天時)를 알고’ ▲“백전노장과 지정(至精)의 무기를 갖고 있는 일제를 훈련되지 않은 군대조차 많지 않은 우리가 무력으로 싸워 이길 수는 없다”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한 가운데 ▲우리의 장점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투서와 용동적 활동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효과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민중이 갖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를 하나로 뭉쳐 엄청난 정치적 압력을 만들어낸다는 ‘비폭력 정치투쟁’론은 무혈시민혁명의 모범을 만듦으로써 ‘진정한 명예혁명’을 완성한 위대한 나라로 대한민국을 끌어올렸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9호(2018년7월18~2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