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의 자가 수필

통곡 痛哭

새밀 2012. 6. 23. 11:41

통곡 痛哭/미산 윤의섭

 

생각만 하여도 잔혹한 6.25전쟁은 점령과 수탈 점유의 목적을 둔 과거의 전쟁과 그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 전사 상 유례가 없는 전쟁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상과 이념의 뿌리를 두고 대결하고, 세를 넓혀 그 이상을 제각기 실현

하고 그들이 구상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엉뚱한 욕심이 발동하여 패권을 잡은 소련 중공 북한 측의

공산군이 자유민주국가로 건국 한지 3년도 안 되는 애기 같은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는 목적으로

남침의 전쟁을 일으킨 뜻밖의 전쟁이었다.

 

이에 놀란 미국을 비롯한 자유 민주진영은 대한민국을 구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그 자체뿐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진영의 패배라고 인식하고 강력한 반격에 가담하여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남북의 강토를 아래위로 훓더가면서 짓이겨 놓았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개발된 비행기 탱크 대포 전함 등 가공할 무기의 시험장이 된 듯이 세계

각국의 무기생산을 가속 동원하여 한국전에 퍼부었으니 이 아니 한스러운가?

우는 것 가지고는 너무나 억울하다.

수백만의 사상자와 이산가족, 그리고 강토의 파괴를 자행하여 국토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이 슬픈 역사를 우리는 오천 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하고 소름 끼치는 전흔의 상처를

회상하고 우리는 앞으로 500년간은 잊지 말고 "통곡의 의식"을 치르면서라도 전승시켜야 한다.

 

제61주년 6·25전쟁 기념식에서는 국군과 경찰, 유엔군 참전용사 30명의 이름을 부르는

‘롤 콜(Roll Call)’ 행사가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전장의 영웅들의 혁혁한

전적이 나열되었다. 이들은 한. 미군의 최고 지휘 사령관들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의

용장들이다.

 

국군은 전쟁 초기 무스탕 전투기로 북한군의 탱크부대를 타격한 이근석 공군 준장, 낙동강 방어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에서 공을 세운 김백일 육군 중장, 대한해협해전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

으로 지휘한 손원일 해군 중장이 포함됐다

미군으로는 흥남 철수 작전에서 피란민 10만여 명을 구출한 영웅 에드워드 포니 준장과

12만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 괴멸시킨 미 해병1사단의 유명한 장진호 전투의 영웅 올리버 스미스

대장, 한국전 발발 직후에 부대원을 이끌고 오산 죽미령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북한군을

처음으로 맞고 죽음의 전투로 적군을 저지한 찰스 스미스 중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오산의 유엔군 초전初戰 전적은 당시 서울을 빼앗기고 고립무원의 국가적 위난을 당한

대한민국 정부의 피난 길이 수원에 머뭇거리다가 서울 함락 소식에 남으로 쫓겨가는 중이었다.

유엔에서 파병결의를 주도한 미국 트르맨 대통령의 결단으로 남침의 기세를 약화하기 위하여

급히 미군의 스미스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오산에서 저지선을 설치하였다.

1950년 7월 5일 하루 6시간을 혈투하여 180여 명이 사상한 미군의 희생으로서  유엔군의 참전

사실을 적에게 알리고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어 한국정부의 긴박한 피란길을 보호하고

반격 작전 수행시간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의미가 있다.

이는 6.25 전사에 있어서 초기 대응이 얼마나 중요 하였는가를 일깨우는 역사의 경험 장이 되고 있다.

 

2001년 10월 14일 뉴저지의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열린 어느 수사 修士의 장례식에 재미 교포

한 분이 참석하게 되였는데, 이분은 미국 교민사회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착실하게 가정을

꾸리던 평범한 비즈니스맨이었다. 운명의 전환점이 된 장례식장에서 고인인 매리너스 수사가

6·25전쟁 흥남 철수 당시 미국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21~23일 흥남 부두에서 북한 피란민 1만 4000여

명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간 선장이었다.

 

이 이야기는 전사에 기록된 흥남철수작전으로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되자 함경남도 흥남 항에서 10만 5천 명의 군인과 9만 1천여 명의 피란민, 차량 1만 7천 500여 대,

화물 35만t을 193척의 함대에 싣고 거제 장승포항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이 한 토막의 전사를 보아도 그 많은 피란민이 어떻게 남하를 원했으며 또 그 가공할만한 수송작전은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피난민과 수송작전의 미군이 문화적으로 이민족인데다 격전장의 긴박한 위험

중에서 그 거대한 작전에 인도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불가사의하다. 그때에 살아남은 수만은

월남 인사들의 그 후 증언은 한결같이 고마운 인연으로 영원히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인도정신이 극렬하게 대비되는 하나의 사건을 회상하면, 저 유명한 모택동의 인해전술을

들 수 있다. 북한군이 패배하여 압록강 근처까지 밀리자 당황한 중공군이 갑자기 대거 남침 반격하여

왔는데, 그것이 1.4 후퇴 전이다. 그 모양이 현대전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 아닌 총알받이 전술이였다.

당시 중공의 경제능력이 척박하였으므로 겨울에 무명솜옷을 입히고 총도 없이 막대를 든 중공군을

징 꽹과리를 치며 눈밭을 내달리게 하는 인해전술을 단행한 것이다.

처음에는 무기를 갖춘 유엔군이 사살하였으나 너무나 많은 중공군이 떼로 달려드니 인명의 살상이

저주의 장이 되는 것을 보고 인도적 후퇴? 작전상 후퇴를 하는 후퇴의 전투를 치르게 되였다.

결과적으로 후퇴하면서 그 많은 피란민과 피비린내 나는 살상과 저주의 역사를 남기고 중공군과 북한군

대표와 유엔군대표간의 정전협정을 맺고 끝장이 없는 휴전을 한 지 어언 60년이 흘렀다.

 

그 인해전술이야말로 중국인의 인명을 천시하는 못된 짓이었다는 것을 현대 세계의 지식은 다 알고

있으며 중국의 고등지식인들이 후회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의 망령이었던 공산주의의 소멸로 인하여 쏘련이 해체되고 중공은 공산주의를 화석화하여

새로운 개방형 중국으로 변신하고 있는데 유독 북한 만이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을 접목한 3대 세습의

독재와 폐쇄 정책을 고집하여 백성을 굼주리게하고 도탄에 빠트리고 있다.

이러한 이념의 대결구도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온존한게 된것은 인도주의를 수반하는 시민의

신뢰감의 승리라 할수 있는 것으로서 21세기의 세계는 인도주의에 뿌리를 더욱 깊게하고 민생을

잘 살게하는것이 최상의 시대로 인식하게 되였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쟁을 체험한 세대와 그렇지 못한 젊은 세대 간에 6·25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국가관

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 하는데 인색한 대신 과거를 부정하고 스스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조는 위험한 현상이라 우려한다.

6.25 전쟁과 같이 온 국민이 겪은 수난의 슬픈 일에 대하여 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데 그것을 덮어 버리가나

기피하면 몰인간성화하여 문화의 퇴행을 가저온다.

수난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도 진실한 인간성의 발현으로 삼으며  지속성이 있는

 정책이 되도록 펼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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