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역사,민족의 주체성을 되살리지 않으면 인접국가에 의해 패망할것/북애자

새밀 2021. 4. 5. 22:09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의 주체성을 되살리지 않는다면 조선은 인접국가에 의해 패망할것 - 북애자 -

<단군세기>서문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쳐질 수 없고,

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

 

개인이 그의 지나온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듯이,

나라와 민족도 그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정체성을 찾을 수 없고,

정체성이 없는 나라와 민족은 다른 힘있는 자에게 끌려 다니며 얼간이 생활을 하거나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숙종2년(1675년)에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저술한 북애자北崖子는 그책에서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의 주체성을 되살리지 않는다면 조선은 인접국가에 의해 패망할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로부터 230여년만에 그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  일본의 우리 역사 말살 

 

일본은 에도 막부幕府시대(1603~1867)까지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과의 국교 유지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막부가 안정을 유지하면서 막부의 지배를 유지, 강화하려는 국학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신의 나라

로 미화하여 민족의지를 단합하는데 노력한다. 그들은 일본의 신과 천황이 조선의 신과 왕이 되어 조선을 다스렸다고

없는 말을 조작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직적이고 계속적인 국민교육을 통해 상식화하고는 막부 말기에

정한론으로 발전시킨다.

그러한 사고가 바탕이 되어 명치시대(1868)이후 일선동조론, 日鮮同組論,일한일역론日韓一域論등

조선 침탈의 관념적 이론들이 나온다.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를 흉내내며 1874년 4월 대만을 침공, 쉽게 장악하여 식민통치의 경험을 쌓은 일본은

즉각 조선으로 눈을 돌려1875년 강화도사건을 일으키고 그 다음해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1885년 <대동아합방론>이 나온다.

그무렵에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조작한다.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을 긁어내어 조작한 것은 이미 그 이전이고,

그리고 마침내 한반도를 집어삼킨 일제는 철저히 한국사를 말살한다.

그 방법은 먼저 이 땅에 전해 온 모든 역사책을 샅샅이 찾아내어 불태워버리는 작업이었다.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운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 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압수에 나섰다.

전국의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兩班家, 세도가勢道家를 샅샅이 뒤졌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 정확히 알수 없으나,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할때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한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 열전류에, 심지어

미국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았던 초대총독 데라우찌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 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 시킴으로써,

사서史書의 인멸에서 더 나아가 역사의 왜곡 편찬에 직접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중추원은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附日역적들이 고문으로 앉아 있었고,

참의와 부참의 15명이 편사업무를 맡고, 일본의 역사학자 3인이 지도, 감독을 맡았는데,

그들어용학자들이 총독부의 명령으로 작성한<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는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편찬사업의 이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때 그 어용학자들에게 내려진 편사지침에는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고 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이 같은 편사 원칙을 세우고 공명 적확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면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여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한다.

겉으로는 중추원이 사료 수집을 맡아 대여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하였다.

압수범위는 이 나라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인물등으로 더 늘어났다.

이에 따라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까지도 압수되었다.

문헌이 풍부했던 문화의 나라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서적들이 나왔던지 총독부 당국자들은

<1918년 말까지 오로지 사료의 수집에만 노력하였던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예상외로 많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압수하고 불태우고 다시 수색하고, 엄청난 인원과 비용을 들였지만

씨를 말리려던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일제는 서적 수색을 계속 사업으로 연장하며

본격적인 조선사 왜곡 편찬 업무에 들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또는 1922년 조선사람을 반半일본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떠벌렸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책의 하나로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총독부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위원회가 1923년 1월8일 결정한 편찬강령에서는 조선사 편찬의 시대구분을 함에 있어서 제1편을 삼국이전으로 정하여, 그 전인 1916년1월 조선사편찬사업 착수 당시 정했던 시대구분 중 <상고삼한>을 없애버림으로써, 우리 상고사를 점차 말살하려는 저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편찬위원회는 1925년 일황 칙령에 의하여<조선사편수회>라는 독립관청으로 승격되었다. 자료 수집 방법에 있어서, 강제 수색, 압수가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장자들이 자료를 숨기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하는 형식으로 그 방법을 완화하면서 총독은 관계자들에게 편찬사료 탐방이란 이름으로 광범위한 사료 수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국의 도, 군, 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토록 강력히 지시하였다. 한편 조선사 시대구분에 있어서, 제1편을 종전에 정한<삼국이전>에서<신라통일이전>으로 고쳐 다시 끌어내림으로써 상고사 말살의 저의를 거듭 보였다. 겨우 남겨둔 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였다. 삼국사기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 신화로 각색해버린 것이어서, 이 두 책은 단군을 부정하는데 활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두개의 책도 변조를 기도하였다. 예켠대. 삼국유사는 진본이 2권 남아있는데 한국의 규장각에 있는 책에는 신불이라 된것을 일본이 가지고 있는 다른 한 권에는 신시로 획을 약간 삐쳐 바꾸어 놓았다. 신불은 한웅천황의 이름이다. 이것을 신시라고 고치면 땅이름이 되어 버린다.

 

신시라는 땅 이름은 <신의 도시> 가 되어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냄새를 풍긴다. 바로 일제가 우리 상고사를 신화로 조작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렇게 바꾼 것이다. 한웅의 이름인 신불이 맞다는 것은 그 뒤의 역사서술에서 여러 책에 신불씨神市氏라는 족명이 계속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도 그렇다. <옛날에 한구이 있었다>는 뜻인 석유한국昔有한國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도 석유한인으로 변조하여 고조선의 입국 사실을 깍아 버리고 환인과 환웅을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하는데 활용하였다, 이러한 무모한 변조는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조선에 와서 조선사편찬 초기부터 16년여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이마니시류가 1921년 <단군고>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모교인 경도제대에<조선고사연구>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조선 중종7년(1512)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을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 영인본이라 하여각계에 배포한 것에 현출 되어있다. 육당 최남선은 이를 일컬어 <천인의 망필>이라고 통박한 바 있다.

 

이마니시류는 단군신화설을 조작한 장본인인데. 이와 같이 천박한 자의 명백히변조한 자료에 기초한 역사왜곡을 우리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여 우리 스스로 단군을 신화라고 하고 있으니, 통곡할 노릇이다. 조선사편수회는 명목상 소수의 조선인 학자들을 포함하여 들러리 역할로 악용했을 뿐, 조선사편찬은 일본인 학자들의 주도로 강행되었다. 조선사편수회의 마지막 회의는 1935년 7월5일 열렸다. 그리고 1938년에 본문 35권 총 24,110쪽의<조선사>가 완간 됐다. 그 방대한 기록 중에서 단군에 대하여 기술한 것은 고려 공민왕24년 백문보라는 사람이 죽을때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우리나라는 단군이래 이미3천6백년이 되니 이는 곧 대주원大周元의 운이 다시 돌아오는 때이다>라는 구절에 나오는 <단군>두자 뿐이다 일제는 이 책의 발간을 위하여 1910년부터1937년까지 무려 27년간에 걸쳐, 자신들의 표현으로도<전 조선 각 도의 방방곡곡에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또한 내지(일본)와 만주까지 찾아>가서 사료를 수집하였는데 <전국에서 발견되는 사료가 너무 많아 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조선사>를 발간하고는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펴낸 그 책을 뒷받침하는 사료만 남기고 나머지는 인멸해 버렸다. 일본이 인멸한 것은 역사책뿐만 아니다. 민속도 말살했다. <일제는 침탈 초기 한국의 민속조사에도 착수하였을 뿐아니라 급기야는 서낭당이나 부락제 등을 미신이라는 명목으로 말살했다.

 

이는 미신을 없애기보다는 한국 민족의 단결을 우려하여 그 초점을 없애려는 기도였던 것이다 일제가 주장한 이른바 미신은 현재의 일본에 더욱성행하며 요즘도 마을제를 중심으로 일본 민족의 단결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부락제나 서낭 신앙 등을 일본보다더 철저하게 미신으로 치부하여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고학적 발국 성과도 인멸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알려진 구석기 유적은 1940년 일본인 나오라 노부오가 발견한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식민사관에 따라 그 사실을 쉬쉬하고 발견 사실 자체까지 외면했다. 조선 땅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이 나오지 않아야 그들이 조작한 조선사(조선에는 구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가 없다는 주장)를 한국의 역사로 강요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석기 유물의 발견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패망 직전까지 우리나라의 무수한 고분을 파헤쳐 왕관을 비롯한 역사시대의 유물을 강탈하였다.

 

★  중국의 우리 역사 말살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이전에 중국이 먼저 우리의 역사를 파묻으로 했다. 동아시아 문명의 역사는 상고上古시대부터 중고시대까지 거의 우리민족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부터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을 우리 민족보다 더 앞선 것으로 하기 위해 상고사를 개편하고 우리 역사를 인멸시켜왔다. 중국의 역사 왜곡은 그들이 통일왕국을 건설하면ㄴ서 바로 시작된다. 역사 짜맞추기가 정치 군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속성이 바로 나타나는 장면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는 진시황의 진秦나라이다(기원전221년).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아서라도 막고자 했을까 한편 분서갱유를 단행하는데. 이는 중국의 뿌리인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유가의 뿌리가 우리 민족 문화임이다. 만리장성과 분서갱유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님이다. 그다음 통일왕조, 겨우15년만에 망한 진秦을 이어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이룬 한漢 이때는 본격적으로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중국 대륙의 상고사를 중국인들의 구미에 맞게 왜곡하였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사형을 면하기 위하여 남근이 제거되는 궁형宮形을 당하여 옥에 갇히면서까지 살아서 기록을 역사에 남기는 사관의 역할에 충실하려한 <삶을 위해 굴욕을 참은 사나이>사마천이 설마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어떠한 역사관을 원했는지 들여다 보아야 한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는 서한西漢무제武帝때였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명실공히 통일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그것을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

 

서한제국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통일된 제국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통일제국의 출현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있게 되었다. 그 이론을  제공한 사람은 동중서였고 그 설명을 한 사람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의 <태사공자서(태사공은 사마천 자신을 말한다)>에서 사기의 편찬 방법과 내용 그리고 그 기중에 대해 "18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30개 수레바퀴의 살이 모두 하나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어 그 운행이 무궁한 것처럼, 보필하는 신하들을 여기에 비기어 그들이 충신의 도를 행함으로써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30세가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마천이 천자를 북극성 또는 수레바퀴의 속바퀴에 비유하고 제후들을 북극성의 주위를 운행하는 18수나 속바퀴에 집중되어 있는 수레바퀴의 살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들과 그 주위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역사를 엮어간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사기는 중국 천자를 중심으로 한 통치질서 안에 포함된 것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통일되어 진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중국에 많은 나라들이 있었지만 사마천은 오제五帝황제, 전욱, 곡, 요, 순)하, 상,주,.진등 황하 중류 유역에서 계승관계에 있었던 나라들만을 본기에 싣고 그들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오제 이전에 있었던삼황을 전설로 취급해버리고 서술하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 중국안에서 살고 있었던 다양한 종좀ㄱ과 여러 신분의 사람들에게 황하 중류 유역 중심의 통일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면적이 유럽전체와 비슷한 중국이 결국 통일국가를 이루어내고 오늘 날 56개(64개라는 설도 있다)민족이 살고 있으면서도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심어준 통일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마천은 오늘의 통일된 중국이 츄지되도록 만든 가장 큰 공로자인 것이다. 황하 중류 유역을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사마천이 심은 황하 중심의 역사의식이 작용한 결과이다. 사마천이 황제 헌원 유웅씨에서부터 시작한 이유가 있다. 한漢왕실인 유씨를 종宗으로 역사를 꾸미려는 의도이다. 나아가 삼황오제 시대를 모조리 유씨의 선조로만 엮고 있다. 이것은 공자가 전승되어오던 문헌을 모조리 없애고 요순시대의 말만으로 정교훈령을 꾸민<서경>식 수법과 같은 것으로서 하족을 하토의 역사 주인으로 설정해 여기에다 꿰어 맞추었기 때문이다.이를 위하여 사마천은 우선 황제에 관한 전설을 집성하였다. 그의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황제전기의 기원은 그리오래된 것이 아니고 오행설의 유행에 따라서 점차 형성된것이다.

 

황제전설 중 중요한 것을 들면. 치우의 난을 평정했다는 것,의복, 주거, 가옥, 궁시등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것 약초를 사용하여 의술을 창시한 일 등이다. 즉 그는 인류에게 문화생활을 가져다 준 최초의 제왕으로 숭앙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 등의삼황부터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그 가계와 혈통과 행적이 너무 분명하고 자세하게 나와 있다. 복희는 배달나라 제5대 한웅인 태우의 천황의 열두 아들 중 막내이다. 하늘같은 검스런 덕이 있어 태호라 불리고 배달나라에서 제후로 봉토 받은 진陳나라를 갖게 된다. 신농은 본래 웅씨에서 나뉘어진 고시례의 후손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은 배달나라 제8대 한웅인 안부련 천황 때 임금의 명을 받아 강수란姜水 곳에서 군사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이 강姜씨가 되었다.그이후의 오제는 모두 이 배달나라의 제 후국인 진나라로 부터 계보를 엮어 내림하니 결국 모두 배달나라의방계손들이다. 황제 헌원은 말할 것도 없다. 소전국의세습제후 계곤의아버지다. 성은 공손이다.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므로 하남성에 있는 헌원의 언덕으로 유배시켰는데, 거기서 낳은 아들이라고 이름이 헌원이다. <사기>오제본기에 하족의 두령인 황제가 인근의 족장인 염제를 복속시킨 뒤 동이의 두령인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큰 전쟁을 하여 치우를 사로 잡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사마천이 중앙집권적 전제국가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중국인들의 시조를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하다. 치우를 이겼다는 것도, 의술을 창시했다는 것도, 전부 그 이전의 역사를 외면하고 무시한 채 조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이전의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이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삼황오제는 모두 우리 배달국의 군소국들이었으며, 중국인들이 우리 조상들에게서 모든 문명을 전수 받았음이 온통 그대로 드러나므로 어물어물하며 이를 신화, 전설처럼 뿌옇게 가려버리고 황제를 내세운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치우와의 싸움을 보자. 치우는 제14세 한웅인 자오지천황으로서, 도읍을 청구로 옮긴 분이다<사기>에는 <치우는 능히 안개를 일으키고 돌과 모래를 날리므로 대적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황제는 지남거를 만들어 방향을 잃지 않았으므로 싸워서 마침내 그를 사로잡았다>했다. 그러나 우리쪽 기록들을 보자. 다음은<태백일사>중<신시본기>에 실린 내용이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사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 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어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수 있었다.온갖 사물의 원리를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시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않는 것이 없으셨다.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의 쇠를 태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많이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해 동안에 대개 아홉 개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 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를 건너서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에 이르렀다 이해에 열두 제후의 나라를 점령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쪽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마주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용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들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가 말하는바의<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웠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때에 공손헌원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백성들의 우두 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감히 백 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하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3000을 이끌고 곧바로 헌원과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 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회대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을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왕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몸ㅅ하고 구리고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를 말한다> 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치우천왕은 더욱더 군대의 힘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 바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73회 했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모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 신시를 본 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 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크게 싸움이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 쪽 장수 가운데 치우비라는 자가 있어 불행히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 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듯 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삼한지기에는 그싸움에서 헌원은 사로잡혔고 치우의 신하가 된 다음 이쪽으로 고신씨 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했다>치우천왕이 돌아가신지 수천 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광열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붉은 깃발 모양의 연기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상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있어서 천 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하는 듯 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전역유기에 왈, 제나라 풍속에 여덟 신의 제사가 있다. 이들 여덟 신은 천주, 지주, 병주,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시주를 말한다. 천주로서 삼신께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으로서 용강의 조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 도술의 조종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을 보른다. 이로써 태시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가 되었다. 유방은 동이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과패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 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혼고(짐승의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지냄)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한나라 임금이 되었던 바, 이로 인해 10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정했다.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기는 하나 역시 동황태일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다 세우게 했다. 그가 치우를 존경함이 이와 같았다.<태백일사 신시본기>

 

 

유방은 항우를 쳐부수고 한나라를 세운 고조이다.그만한 인물이 큰 전쟁을 앞두고 하필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쪽의 기록대로라면 치우는 형편없는 인물이고 황제 헌원에게 잡혀 죽었는데 유방이 왜 치우에게 제사를지내는가 중국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단고기를 처음 번역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는 <사마천의 사기>는 한민족의 중국지배를 감추기 위해 대단히 역사 위조를 했다. 한漢민족의 이름도 한韓의 이름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오제중 황제 이후의 나머지 사제도 마찬가지다. 제전욱(전욱고양, 제곡(제곡고신), 제요(요임금), 제순(순임금)등의 가계와 혈통 및 그들이 한 일이 우리 기록에는 자세하고 명백하게 나온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는 그런 것들이 감춰지고 심히 왜곡되어 신비하게 가려지거나 과장되어 ㄹ대단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기실 그들은 모두 동이의 후손들이므로 그들의 역사는 모두 우리 역사이다. 중국은 이를 감추기 위하여 삼황오제를 신화 내지 전설인 것처럼 뿌옇게 가리고는 과장의색칠을 하였다.

 

 

중국의 강단사학이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묻어버린 삼황오제 시대(기원전2517~2298.9대 219년간)가 사실은 실존했던 역사시대이고 그것도 한국의 고대사이었음을 가장 명쾌하게 밝혀낸 사람은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역사학자인 낙빈기(1917~1994)이다.그는 고대 금문을 연구했다. 금문金文은 일반적으로 각종 금ㅁ속에 새겨진 글자를 총칭하는 것인데. 낙빈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삼황오제 시대의 청동으로 만든 각종 농기구와 병장기, 돈, 제기 등에 새겨진 글자인 상고금문(또는 오제금문이라한다)을 풀어냈다. 상고금문은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보다 1000년이나 빠른 고대 상형체 문자이다. 낙빈기는 논리 정연한 증거를 바탕으로 필생의 역작인<금문신고를 1987년에 발간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이어서 정부의 허가를 얻어 800여권을 인쇄했으나 대부분이 출간즉시 몰래 회수되어 금서처럼 묶여버렸다는데, 다행이 그중 네댓권이 국내에 들어와 알려지게 되었다.상고금문의 내용은 우리말로써만 해독이 되고, 우리말 중에서도 특히 신라계의 경상도 말로 잘 풀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말 중에서 상당히 많은 말들이 바로 중국의 고대언어라는 것이다.문자가 생기기 이전에 말이 먼저 있었고 그말을 기록하기 위하여 문자가 만들어졌음에 비추어보면, 상고금문의 주인은 우리조상이었다는 것이 바로 증명되어 버린다

 

 

한족漢簇이라는 말 자체가 삼황오제 시대에는 없었다. 안호상박사의 고찰에 의하면 한족이란 명칭은 근대에 오면서 생긴 것이지 그런 부족이나 민족은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당, 송 시대에 범엽의 엮은 후한서만 해도 지나대륙에서 살아온 민족들에 대한 상세한 분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이란 명칭은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나라 말기의 어지럽던 천하를 통일한 것이 진시황의 진나라요, 그 진나라를 잇는 것이 전후 4백년에 걸친 한나라인데, 후한서에 한족이란 명칭이 없으니 그 한나라조차도 한족과는 상관없었다는 말이 된다. 한족이란 명칭은 신해혁명을 일으킨 손문으로부터 겨우 시작된다. 그는 만주족의 청나라를 뒤엎고 중화민국을 새로 세웠다. 그러자 그 이름을 줄여서 중화니 중국이니 하는 이름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중국은 한족, 만주족, 몽고족, 회족(흉노족), 서장족의다섯 민족이 모여 된 나라라 했는데. 한족이란 이름은 그때 처음나타나고 사용되었다.

 

안호상 박사가 참고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한족을 말하여 <한나라때 그 위업이 이역에 널리 떨쳤으므로 위진 시대를 지난 이후까지 외국 사람들은중국을 자주 한이라 말하게 되었다.또 본국에서도 자칭 한이라 하다가 드디어 한漢은 종족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고 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조작과 함께 중국인들은 우리 쪽의 기록을 없애는 방법으로도 우리 상고사의 흐름을 단절시켰다.고구려 초기 동천왕때 유주자사 관구검의 군대가 환도성에 쳐들어 온 것은 구토침략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서책을 훔쳐가기 위한 목적에서 였다 그때 실어간 서책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 서진의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이다.

 

결정적인 것은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온갖 역사책들을 보관해 오던 만주 요동 지방의 경관에 제일 먼저 파괴하고 그 역사를 당나라의 소유물로 만든 것이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무너질 때 먼저 불이 난 곳도 역사 서고다 4개월 여를 탔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할때도 당나라 군인 이세적은 당 고종으로부터 <백제의 서책을 반드시 불지르라>는 명령을 받고 와서 사비성의 역사서책 창고를 맨 먼저 불태웠다. 불길은 몇달 동안 꺼지지 않아 서고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몽고족의 원나라가 고려를 침략했을 때 전국의 사고를 불태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모두 중국의 지배세력들이 우리의 뛰어난 옛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파묻으려 한 짓들이다 중국인들이 견지하는 주된 역사적 관점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남긴 사서를 연구할 시에 주의해야 할점으로 흔히 중화사관中華史觀이라고 하는데. 첫째 중국에 수치스런 기사는 숨긴다. 2)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깍아 내린다, 3)국내사는 상술하고 국외사는 약술한다는 것이다이러한 사관의 뿌리는 사마천의 <사기>보다도 휠씬 이전인공자의<춘추>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가 싶다.

 

공자는 자신의 모국인 노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은공으로부터 애공에 이르는 242년 동안 시해 당한 임금이 다섯이나 있었고 내쫓긴 왕도 있었으나 그런 사실들을 <춘추>의기록에 전혀 올리지 않았다. 존자와 현자와 친자의 허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예라고 변명 대었으나 지짜 이유는 모국노나라의 자존심을 위해서다. 공자의제자들 역시 그랬다.

 

 다 알면서도 스승이 은페한 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었고, 누가 혹 물어도 춘추를 방패해서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춘추의 명분이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억지와 자존심이지만 이것이 후세로 가면서 중국의 사가들을 순전한 제 이익의 필법으로 자연스럽게 길들인다 그러한 자세는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변방사로 폄하하여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억지 시도도 그러한 자세의 연장이다 동북공정에서 더 나아가 2003년6월부터는 그들이 신화와 전설로 채색해 놓았던 3황5제화 하나라를 역사시대로 편입하려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단계로 넘어갔다 이는 동북공정보다 휠씬 거대하고근본적인 역사왜곡으로서, 중화만족의 위대성을 고대 역사를 통해 확인하려는 오래된 패권주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줄기차게 괴롭혀 왔던 그 패권주의가 다시 요동치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의 패권주의는 한반도 통일 이후의 동북아시아 정세 변화를 내다보고 일본 및 미국과의 패권경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말살한 역사

우리나라의 고사서古史書는 도가道家사서, 불가佛家사서, 유가儒家사서로 나눈다 이중 상고사 적어도 단군조선사에 관하여 가장 풍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도가사서이다도가는 순수한 중국의 전통적인 도학자인 노장사상가와 달리, 단군 이래의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교의 신봉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들 도가사서는 고려 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후 유학자들로부터 배척 당하기 시작했다.유교와 존화사상을 국시로 하는 근세 조선이건국되자, 국초부터 유교사서와 어용사서를 제외한 그 이외의 사서들은 국시에 위배되는 이단사서라고 하여 박해를 받았다.

 

태종11년(1411)예부텅 궁중에 비장하여 내려오던<신지비사><해동비록>등 많은 고서적과<도학사서>들을 없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 등을 겪으면서 많은 사서들이 다시 소실 되었다

우리 역사가 중국과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말살되었다. 일제가 우리 역사책을 보조리 없애면서 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남겨두었는지 잘 헤아렸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그 피의 뿌리부터가 우리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는곡수 모화주의자가 쓴 책이다.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은 고려 선종 때에 예부시랑을 지냈다. 이자가 글은 잘 했던 모양이나 고려인으로서 송나라 쪽에다가 얼마나 코를 박고 비열한 아부를 하였던지 그쪽 선비들이 감동해서 소화집

小華集이란 제목으로 시문집을 내어 주었을 정도이다. 제목부터 소국에 시혜를 준다는 사대적 냄새가 물씬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그 은혜에 감읍한다. 그리하여 제 아들의 이름에 중원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문장가 소동파의 이름자인 식자를 따서 박는다.

 

그리고 김부식의 동생 김부철의이름자에는 소동파의 아우 소철의 이름자를 박는다. 삼국사기를 쓰는데 기초가 된 자료는 구당서나 신당서 따위의 중국 기록이 거의 모두임은 그 책의 내용으로 헤아려 알수 있다. 오직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삼ㅁ국사기를 편찬했다고 그 스스로 자인하고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가 나온 것은 묘청의 서경천도사건이 있고 나서 5년 후인데, 그 5년 동안에 그가 자료수집을 위해서만도 무려 네 차례나 중국을 다녀온 것도 그가 의존한 자료의 경향을 파악하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해동고기, 삼한고기, 고구려고기, 신라고사, 선사, 화랑세기,등을 참고했노라고 삼국사기 속에 쓰고 있다 "참고"가 무엇을 어찌했다는 뜻인지 구체적으로 알수 없으나, 생색에 불과한 말이다.

 

중국 사가들이 역사를 적는 잣대가 어떤 것이지 앞에서 보았는데 그러한 중국 사서를 기초로 쓴 책이면 그 실체는 중국 사람이 쓴 역사책과 같은 것이지 우리가 쓴 역사책이라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반드시 개소문으로만 적는다. 당태종 이세민의 아버지인 당고조의 이름이 이연인 까닭이다. 김은 소국의 신하로서 대국 황제의 이름을 감히 쓸수 없다는 같잖은 충성심을 스스로 발휘한 것이다. 그러면서 연개소문의 성을 굳이 적을 경우에는 천泉으로 적는다, 여기에도 참으로 같잖은 수작이 들어있다. 연淵은 흐르는 강물이 깊은 웅덩이를 만나빙빙 돌면서 끓어 넘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사람이 들어갈수가 없이 크고 위험한 물이다 용龍은 그러한 연에 잠긴다. 반면 천泉은 용달샘이 겨우 언저리를 넘어 졸졸거리고 흐르는 것을 나타낸다. 연개소문의 기상을 한껏 축소하기 위해서 천을 성씨로 고른 것이다. 신라 법흥왕이 연호를 쓴 것을 나무라며 지껄이기를 <천자의나라에 신하로서 속한 편방 소국이 본래 삿로 연호를 쓸수는 없는것이다>라고 한다.

 

삼국의 역사를 쓴다면서 가야를 모두 접었고, 진국사震國史(발해사)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패수貝水가 만주와 요동에 일곱 개나있는데도 그것을 취하지 않고 오직 평양에 있는 대동강을 패수로 쓴다 이렇게 우리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한 것을 지적하자면 한정이 없다. 이렇게 시키지 않아도 엎드려서 길줄을 아는 정도가 길바닥에 내갈겨진 소똥만도 못한 김부식이 지나 사가들이 던져준 서책 속의치욕스런 자귀들을 어디에서나 그냥 적고 있는 것은 그 자의 그릇과 자질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나. 일본이 왜 이 책만 없애지 않고 남겨두었는지도 헤아려 보지 못하고 이런 자가쓴 역사책도 책이라고 정사正史의 표본처럼 떠 받들고 있는 우리 역사학계의 인사들은 어떤 정신으로 역사를 보는 자들일까?

 

★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나름대로 자주적 시각에서 삼국사기에서 빠지 부분과 망각된 일들을 보충한다는 취지로<유사遺事>라 이름 붙인 책이다.

 

 삼국사기의 편협한 시각과 유가적 가치관을 벗어나 인간 평등의 민중의식을 드러내고 민족사의 유구함과 민족의 우수함을 보여주려고 하였으며 문화사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책도 자료의 상당 부분을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고,우리 상고사를 형편없이 축소하고 있으며, 그것도 황당무계한 신화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 문화를 모두 불교에 뿌리를 둔 것처럼 왜곡해 버렸다. 이는 개국이래 조선조 말엽까지 우리의 국조로 존숭되어온 단군을 최초로 부정한 인물인 일본인 사학자 나가통세가 1894년 조선고사란 논문에서 <단군신화는 불교도들의 말설이요 날조다>라고 주장하는 빌미를 마련해 준 셈이 되어버렸다. 단군조선이 망하고 삼국이 들어선 초기에는 상고로부터 내려온 우리 문화의 뼈대가 남아 있었으나 불교가 들어와 지배계층에 수용되면서 우리 문화를 깔고 앉아 버린다. 예를 들어보자,상고시대에소도는 우리 정신과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곳에는 조상을 모셔놓고 하늘과 땅, 자연의이치를 가르치는 지도자가 계셨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조상니께 절을 하고 그곳을 지키는 지도자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가르침을 받았다. 절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을 "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불교가 소도를 빼앗아"절"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불교의 수행장소는 본래 사찰, 가람이지 절이 아니다) 한웅 할아버지를 모시던 사당에 한웅 대신에 부처상을 모셔놓고 대웅전이라 하게 되었고 "스승님"이라는 칭호를 "스님"으로 줄여서 쓰고 있다.대웅은 본래 한웅을 가리킴이니, 불교에서는 웅雄이란 말이 나올수 없는 것이다. 절도 대웅전도 스님도 모두 우리의 소도문화를 빼앗아가 왜곡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문화의 변형을 삼국유사는 감추고 있는것이다 우리 상고사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삼국사기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줏대 있게 우리 문화를 살린 귀한 책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보면 이 책 또한 우리 역사를 그것도 민족의 혼과 얼의 뿌리를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감추는데 큰공을 세운책밈을 급방 알게 된다. 제 민족, 제 조상, 제 뿌리의 역사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식자들이 이 책을 대단한 사서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승스님의 말씀<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작은 자료라 해도 우리 것인 줄을 알면 버리지 말아서. 그것을 내 속에 흐르는 정신적인 신앙이나 핏줄의 감각으로 검토하는 자세>를 가졌어야 했다.<그런 태도만이 거짓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서 우리의 혼을 지켜 갈보루>가 될것이기에<규훤사화>같은 책들은 만행 중에도 살아남았다 이 책은 숙종 2년(1675)북애자가 고려 말엽에 청평도사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3권을 바탕으로 하여 쓴 것이다<진역유기>는 또 발해 왕자 대광현 등 발해 유민즐이 고려에 망명하여 올때에 가지고 온 <발해비사>인<조대기>를 저본으로 하여 서술된 것이다, 북애자는 조선 팔도 전국 방방곡곡을 편력 답사하면서 옛 사서들을 보고 이를 수집하여<규원사화>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존하고 있는 도가사서중 단군조선사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것으로 여겨지며 가장 방대한 고사기류와 문현을 바탕으로 하여 비교적 상세하고 합리적으로 저술한 단군실사라고 할수 있다. 무애 양주동이 감추어 두었던 소장본을 일제 치하인1940년 남창 손진태가 극비리에 필사하여 두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하교 도서관과 서울대하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 1부씩 기증한 것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것만 남아있다.

 

일제가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우리 사서를 약탈하여 조선사편찬사업을 벌여놓고 우리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에 혈안니 되어날뛰던 시기를 전후하여 절멸되어 가는 우리 역사의 명맥을 살려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광복후에 올바른 우리 역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우국지사 또는 재야 사학자들에 의해 펼쳐졌다. 그분들은 우리 역사의 말살, 왜곡을 크게 근심한 나머지 조상 전래의 각종 사서들을 몰래 감춰 신중하게 고구考究검토한 끝에 우리 상고사를 편찬 저술하여 놓았다. 고려 초엽에서 중엽에 걸쳐 도학자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 중<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3권과 조선 태종 때 일십당주인,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를 합본하여 1911년5월에 운초 계연수씨가 묘향산 단굴암에 숨어서 한권으로 편집 발간했다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한단고기>이다 

 

조선사편수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던 사람중, 대한 제국 학부편집국장을 역임한 사학자 어윤적은 조선통독 데라우찌가 부임하자마자 우리 사서20여만 권을 약탈 소각하는 것을 보고 이 땅의 사서가 절멸될 것을 우려하여 1915년에 <동사연표>를 작성하였고(이책은 1934년에 재판되었으나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매 금지 외었다), 사학자 윤재구는 <조선사>가 출간된후 낙향하여 겨레의 정사가 말살된 것을 몹시 애통하게 생각하던 끝에 눈물겨운 참회를 하면서 제자인 서계수와 함께1939년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를 간행하였다. 

 

외에도  신단실기, 조선사략, 대동사강, 조선역사 등이 일제 치하에서 간행되고 해동춘추, 민족정사등이 해방 후 간행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사료로 활용하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이나라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선대들이 만들어 놓은 사서들은 기피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지식인들까지도 단군을 설화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려는 태도를 알게 모르게 내보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오히려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학자 이마니시류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병도, 이완용의 질손이었던 그 이병도의 원고를 국사 교과서로 찍어낸다(지승스님은 이병도를 김부식과 이완용을 합친 것만큼 나쁜놈이라고 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라는 거짓 책으로 뿌려놓은 모화사대사상과 일본이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줄이고 깍고 비틀어 놓은 식민사학의 비열한 야합이 <실증사학>이라는 뻔뻔한 이름으로 버젓이 주인행세를 하려 들게 되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천지신명과의 이야기도 아니다. 신화의 신神은 우리 고어古語의 검儉의 뜻이다. 단군왕검이라 할때의 검儉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검儉스런 이야기><영검靈儉한 이야기>이다. 지금도 우리는 산실産室앞에 쳐놓은 새끼줄을 신색神索이라 써놓고 검줄로 읽으며, 칠성단에 묻는 붉은 황토를 신토神土라 쓰되 <검토儉土>로 읽는다. 광복이후 민족의 뿌리를 잘라내고 싶은 자칭 실증주의 식민사학자들은 한결같이 구조國組의 개도로 선전해왔다. 그들은 신화 속에 담긴, 상식으로 닿지 못하는 부분을 종교쪽의 몫이라고 해석하고 역사와 종교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민중을 설득했다.

 

인류를 이끌었던 위대한 상고문화가 고조선과 함께 막을 내리면서, 그나마 고구려, 신라 등에 남아 있던 그 흔적들마저도 희미해져 나라를 이끌 힘을 잃어갈 때 우리는 불교문화를 수입한다. 삼ㅁ국을 막론하고 왕실에서 먼저 받아들여 귀족사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상층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이 가지고 살았던 고유 문화는 서민들과 함께 불교 아래에 놓인다. 고려말까지 그랬다. 일본서기 흠명천황조에 백제가 일본에 원군을 청하니 일본에서 답하기를<너희 나라에는 옛부터 고유의 도가 있으나 불교가 들어와 그 도를 돌보지 않으니 이제라도 그 도를 부활하여 닦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이 있다

 

동양의 책력에 대하여, 신시시대(한웅시대)에 한역과 책력을 만들어 사용하였음이 기록에 나오는 바이지만, 중국의 기록에도 책력이 우리 조상이 만든 것임을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서량지라는 학자가 쓴<중국사전사화>라는 책에<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상나라의 동이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쓰여있다 오방설 또는 오행사상이라는 것도 그렇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에게는 동서남북중을 오방으로 파악하는 인식체계가 있었다.<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와 <배달전서>에는 인류의 시조(최호의 인간)인 나반과 아만이 맑은 물(천수, 정안수)를 떠놓고 혼예를 치르는데, 남쪽 산의 붉은 까치가 와서 즐거워하고, 북쪽 물가의 신령스런 거북이가 와서 상서로운 기운을 드리우고, 서쪽 골짜기의 흰호랑이가 와서 산모퉁이를 지키고, 동쪽의 시내에서 푸른 용이 공중에 오르고, 가운데 있는 누런 곰은 거처를 마련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이 이를 차용하면서 가운데 있는 누런곰(황웅)을 쏙빼버렸다. 그래서 요새 사람들은 사방을 지키는 좌 청룡, 우백호, 남조작, 북현무만 알지 중앙의 누런곰은 전혀모른다.

 

역사의 원형 편에서 보듯이 요임금이 오행을 왜곡하여 중앙 토土라는 임ㅁ금의 자리라고 하여 임금이 사방을 지배하는 모양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요는 이와 같이 하여 전제군주제를 합리화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애초에 일체를 평등하게 만든 하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단군의 신하 유호씨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토벌 당하여 자례自閉하고 있다가 죽는다.

우리가 배워온 사서삼경이니 공자왈 맹자왈 하는 인의의 도를 비롯하여 하늘의 철리를 규명하고자 한 성리학 등에 이르기까지 뭇 동양사상들은 그 근본 뿌리와 맥이 한인, 한웅, 단군으로 내려오는 우리 상고사에 있다. 이는 우리쪽 기록에 많이 남아 있을 뿐더러, 그 기록이 다소 미심쩍으면 우리의 풍속과 민속, 우리가 이어 받아온 정신세계를 잘 들여다보고 기록과 마주 비추어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갈 것이다. 제6대 단군천황 달문임금(재위 기원전 2083년~2047년)때 신하 팔부루가 천황에게 아뢴다

 

치국평천하의 도는 먼저 자신의 명덕을 밝게 하는데 있고 다음은 백성을 친애함에 있고 마지막은 지극히 착함에 있나니, 대개 사람의 지능은 먼저 그 물정과 물리를 알아야 점점 발달하게 될 것이요. 물질의 정과 이치를 알게 되면 가히 백성의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게 될것이요. 수신은 제가의 근본이요, 제가는 치국의 근본이요, 치국은 평천하의 도입니다. 수신의 도를 잘 알아서 실행하면 치국이라도 또한 가능할 것이옵니다. 이에 달문천황께서<옳다 그대는 치국 용병하는 도리를 수신하는것에서 얻었구나>하셨다. 천하를 다스릴 자는 먼저 자기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글이다.

 

그런데 이는 사서삼경 중<대학大學>의 골자인 삼강령三鋼領<명명덕明明德,친민親民, 지어지선至於至善>및 팔조목八條目<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과 거의 같다.위의 글이 사서삼경보다 훨씬 앞선 것임은, 대학에는 말, 즉 이론만 있지 실천, 실현의 방법이 없으나 팔부루의 말에는 생생한 실천의 도가 전제되어 있다. 사서삼경에는 이론만 있다는 것은 명명덕의 뜻을 밝히는데서 이미 드러난다 백론百論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라, 한번 행함만 못하다.

 

 황종국 판사 "의사가 못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 제 3권 우리역사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출처: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초롱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