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이하동서설과 부사년

새밀 2020. 6. 8. 12:00
 

 

 

 

이하동서설과 부사년

박기수 2017. 3. 13.

 

 

夷夏東西說

중국의 근대대학자로 북경대와 대만대교장을 역임한 부사년이 중국문명을 정리한 학설이다.

고대중국대륙은 서는 하족이, 동은 동이족이 각각 황하문명을 창조했다는 학설로 역사학자로서 당시의 고고발굴에 참여하여 고고학적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황하상류의 앙소문화와 중하류의 용산문화는 현격한 차이로 채도와 흑도로 크게 분류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앙소문화가 원류라고 주장하나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학설상 논거는 불충분하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하북.산동.하남.안휘성과 동북지역의 요서.요동일대가 용산문화의 발견된 지역과 일치한다.


대문구문화유물

 



 



 



 



 



 



 



 



 



 



 



 



 

 

동이족의 주요 사전문화로는

1.北辛문화는 기원전5000년이상 소급하며 앙소문화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大汶口문화는 기원전4500년전이전으로 앙소문화와 많은 차이로 용산문화말기의 문화로 태산거현유적이 대표적이며 원시한자.질그릇등이 다수로 초기 고조선문화지역으로 본다.

3.홍산문화는 료녕.내몽고 동부지역으로 기원전4000년 이전의 신석기중기2단계의 문화이다.

4.용산문화는 기원전2800-2000년전으로 하남.섬서.하북.산동(중심;산동 역성현 용산진 성자애)는 동이문화의 대표로 하북.하남.산동.료서.료녕지역으로 고조선.고죽국.중산국지역으로 석묘계의 문화이다.

 

 

 

동이지역문화의 특징

청동기는 4400년전의 요동.요서지역에서 청동기가 다량발견중으로 황하유역의 청동기보다 빠르다.

홍산문화의 묘장은 석관묘로 고조선의 선조문화로 추정(청동기문화의 기원)되며 스키타이계의 동천루트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고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은 신석기문명이 기후의 변화로 민족이동이 생긴 것으로 본다.

소부리씨(예맥족)가 소의 등뼈를 이용하여 점복기록이 갑골로 남았고 중원지역은 요순시기 홍수기록(수메르 노아의 방주)이 많다.

서양지(대만대)교수는 중국사전사화에서 한족이 중원에 들어오기전 중국 남북은 동이족(묘족)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동이의 무대는 산동지역지역이다

왕동령교수는 중국사상 현재의 호북.호남.강서지역은 동이 묘족의 지반이었다(구이;치우왕)

임혜상교수는 중국민족사에서 맹자가 순임금은 동이족이다하여 은의 조상은 동이족이며 기자동주설을 주장한다.

고대사의 대학자인 하광악교수는 중국의 원류는 동이족이라 확신하는 주장을 한다.

시코크 고르프의 중국사에는 기원전 3000년경 동이족은 장강과 서강의 중류이동지역의 중간에 살았고 한족은 이보다 1500-2000년후에 동이족의 기반인 강회지역에 진출하였다고 한다.


용산문화유물

 



 



 



 



 



 



 



 



 



 



 



 



 



 



 



 



 



 



 



 



 



 



 



 

 


부사년교수는 동이족의 민족과 문명을

복희씨의 희역과 하의 연산역,상의 귀장역,주나라의 주역의 분석으로 한민족계열은 서융.북융.산융으로 서융은 반고(백이),(서융계),북은 흉노족, 서는 서융족, 동은 동이계열로 본다.

중원은 회이.견이.풍이가 흉노족의 돌궐.선비.거란.오환.저족의 조상으로 보며, 동이족은 예,..숙신.말갈(여진)99이라고 한다.

융은 티벳.타타르.중아부족으로. 서흉노는 서역과 유럽으로 진출한 것으로 본다.

선비계는 북위.북연...거란왕조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여진계는 금...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고구려 남부여(백제)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본다.

돌궐은 아랍세계로 진출하여 셀주크와 오스만 투르크를 건국한 것으로 본다.


앙소문화유물

 

 



 



 



 



 



 



 





이하동서설은 1960년대이전의 중국사학계의 통설로 인정되나 1950년이후 은허의 재발굴과 이리강문화유지의 발굴과 1959년 이리두문화유지가 발굴되었다.

이리두문화는 하상문화로 용산문화가 선행문화라는 것이 확인되고 1983년 신이리강문화유지를 발굴후 원류가 서로 다른것으로 본다.

2000년전후에 이리강문화가 동으로 확장된 것으로 상족은 동이족과 다른 민족이라 주장하여 기존의 이하동서설과 배치되는데 중국의 민족주의사학자들의 의견으로 보기도 하여 아직은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만큼 중국민족의 구성과 발전은 아주 복잡하다.

중국의 최근기류는 민족중심의 목적논적 사학의 견강부회현상은 아주 심각하여 걱정이다.

 


하가점하층문화유물



 

 



 



 



 



 



 



 



 



 



 



 



 



 



 



 



 



 



 



 



 



 



 



 

 

傅斯年(1896-1950)

부사년은 산동성 료성인으로 자는 맹진인데 료성의 부씨망족의 종손으로 진사만 100여명이 배출된 집안에서 태어나고 대대로 내려오는 사가장서의 영향으로 역사학의 대가가 된다.

그는 54운동의 영수중 한명으로 역사와 고전문학의 대가로 인정받는데 민국시절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장으로 고고학자 이제와 은허발굴을 주도하고 북경대교장을 지내던중 장개석과 대만행으로 대만대교장에 취임하나 1950년 병사한다.

그는 중국근대문화의 창도자중 한명으로 신조잡지를 발행하고 백화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급진적인 계몽운동중 호적의 영향으로 점차 온건한 개량파가 된다.

그는 1919년 영국으로 건너가 에딘버러대학과 런던대에서 연구하고 서양의 각종학문을 섭렵하고 1923년 베를린대학에서 어언학을 연구하고 1926년 귀국후 장개석의 청당운동을 지지하고 중앙연구원을 창립후 학문에 전념하고 안양의 은허등을 발굴한다.

1929년 북경대교장이 된후 항일과 학문연구로 동북사강을 저술하고 1932년 출간하였고 중일전쟁시는 서남연합대의 교수로 재직한다.

이후 장개석의 대만철수시 동행하고 대만대교장이 되는데 역사와 문학논문 100여편을 발표하고 이하동서설도 그중 하나의 논문으로 부맹진선생문집이 사후에 6권으로 발행된다.

부사년의 학문적업적은 가문의 수만권의 고적장서와 스승이 북경대교수 黃侃으로 고전학의 대가로서 학문의 기초가 튼튼하고 고문서적의 해독을 통해 동북의 민족원류인 동이족연구에 큰 성과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중국 근현대사의 주요인사들과 교유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학계와 정계를 두루 섭렵한 합리적인 인간상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이하동서설은 근대이후 김육불의 동북통사와 더불어 중국의 동북역사의 전범이 되고 하광악과 림혜상 손진기등이 이를 계승하고 연구하여 중국사학계에서 동북사연구의 원형이 되었다.

 

 



 



 



 



[출처] 이하동서설과 부사년|작성자 박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