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19)원조선의 산업과 무역[윤명철의 한국 한국인의 재발견]

새밀 2020. 2. 8. 11:58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의 재발견]

옥·비단·말·모피 최상품 수출…원조선은 동아지중해 무역 강국

입력2020.02.07
(19)원조선의 산업과 무역

높은 수준 옥·비단 제품 /활발했던 모피 가공업  /화폐사용 빠르게 증가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있는 중국 산둥성의 척산과 석도만. 원조선과 제나라 간의 무역항이었다.
                                
한국은 1962년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서울 남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옥상의 전광판에 뜬 숫자를 확인하며 등교하던 까까머리 학창시절이 엊그제 같다. 500년간 농사만 짓던 사회가 공업과 무역을 국가 전략으로 택했다. 그 결과 2019년에는 무역액 1조달러를 넘어 세계 무역 8강,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됐다.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있는 중국 산둥성의 척산과 석도만. 원조선과 제나라 간의 무역항이었다.


현생 인류는 초기부터 상업을 했고, 곧 원거리 무역을 했다. 3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유적지(유럽의 중심부)에서 지중해나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가져온 조개껍데기가 발견됐다. 뉴기니와 북부 뉴아일랜드섬에 살던 사피엔스는 칼날을 대신한 흑요석을 바다 건너 400㎞ 떨어진 뉴브리튼섬에서 가져왔다. 발트해의 호박, 지중해의 조개껍데기가 1500㎞ 내륙으로 들어간 홍적세 크로마뇽인 유적지에서 발견됐다(재러드 다이아몬드 《어제까지의 세계》). 그렇다면 만주와 화북 일대, 동아지중해권에서 근거리 무역이 활발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대 중국 능가한 원조선의 산업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주나라나 춘추전국시대라 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사회로 안다. 반면 기원전 10세기 전후의 우리는 원시적인 수준이었으며, 산업도 외국 무역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원조선은 제련술과 제철술 등 금속산업과 요업(세라믹)이 매우 발달해 뛰어나고 화려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기술력이 발전했고 지식과 경험을 활용한 실용과학 수준이 뛰어났던 결과다. 당연히 다른 분야 산업들도 동반 발전했다.

광업도 발달했다. 원조선의 영토였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이 다양한 자원의 보고였기 때문이다. 1970년까지 북한 경제가 우리를 앞선 것은 일본이 건설한 중화학공업 잔재를 활용한 것 외에 풍부한 지하자원 때문이었다. 또한 왕험성 후보지의 하나인 고구려의 요동성과 안시성(해성) 지역은 동아시아 최대,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뒤 ‘안산제철소’를 건설해 대륙 침략의 자원 공급지로 이용했다. 이 지역은 은 생산지로 유명하며, 북한은 원조선의 은광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철은 내수용으로 사용됐지만 수출품이기도 했다. 무기·농기구·동전 등의 완제품과 기술력으로 만든 철덩이(鐵鋌) 같은 1차 가공품들도 수출했다. 《후한서》 《삼국지》 등의 기록을 보면 원조선 말기에 남쪽의 삼한 소국들도 철을 화폐나 수출품으로 사용했다. 원조선은 옥 광업이 발달했고 가공 기술도 뛰어났다. 동아시아 최고(最古) 최대 문명인 랴오허문명(遼河文明), 그 가운데에서도 핵심인 홍산(紅山)문화에 요즘 많은 관심을 갖는다. 신석기 문화지만 원조선과 연관성이 깊기 때문이다. 핵심 지표 유물은 옥 제품들이다. 정교한 가공술과 화려함, 다양한 종류의 도구·장식품에 담긴 풍부한 상징성과 고도의 논리, 많은 양과 뛰어난 가공기술 때문에 고대문명에 대한 통념을 깨뜨렸다. 만주 지역이 낙후됐고 문화가 열악했다고 여겼던 한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옥의 산지는 압록강 하구 서쪽인 ‘수암(岫岩)’이다. 그렇다면 약 5000년 전에 남만주에는 원거리 무역망이 구성된 것이다. 이를 계승한 원조선의 만주에서 황해도에 이르는 유적에서 강옥·벽옥·연옥·홍옥·청옥·수정·마노를 비롯한 각종 구슬이 대량으로 발굴됐다. 대표 고분인 강상무덤에서는 대롱 구슬, 장고형 구슬, 둥글고 납작한 구슬 등이 무려 771개나 발굴됐다.

철·옥 등 광업, 비단·말·모피 생산

중국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황옥으로 제작된 옥누에 공예품(왼쪽).

중국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황옥으로 제작된 옥누에 공예품(왼쪽).

또 하나 놀랄 만한 원조선의 산업과 무역품은 비단이다. 세계인들이 ‘실크로드의 주역’ 하면 중국 또는 한족을 떠올리지만 ‘서역’이라는 신장 지역조차도 페르시아계, 투르크계, 몽골계 상인들이 주역이었다. 우리는 거기에 더해 비단 제품은커녕, 문익점 이전에는 면제품도 없었던 것으로 안다. 신석기 시대인 홍산문화 유적에서 다양한 형태의 수준 높은 옥누에 공예품이 발견됐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삼한 지역에서 기자가 동래하기 이전부터 누에를 키우고 비단천을 생산했다고 기록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중국 기록들을 보면 고구려인들은 옷, 모자(임금이 쓰는 백라관, 신하가 쓰는 청라관 등), 장식품 등에 다양한 종류의 비단을 사용했다.

그런데 원래 가장 유명하고 우수한 비단은 만주 제품이다. 누에가 내뱉는 남색 실크가 빛에 따라 색이 변화무쌍하므로 ‘천잠(天蠶)’이라 칭송받았다. 중국 학자들은 원조선과 부여의 중심지였던 지린(吉林)시 쑹화(松花)강가의 서단산 문화를 ‘천잠명주(絲綢)문화’라고 부를 정도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원조선은 축산업을 장려했고, 특히 말 수출을 했다. 말은 15세기까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였고, 고가의 무역 품목이었다. 한나라 무제가 장건을 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 지역)까지 파견한 목적은 흉노의 기마병을 대적할 말(한혈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기》에 따르면 바로 그 시기에 위만조선은 전쟁을 종식시킬 목적으로 태자에게 군량미와 함께 무려 5000필의 말을 한나라에 보내게 했다. 이런 목마산업은 고구려로 계승돼 중계무역까지 벌이게 했고, 발해 또한 유명한 말 수출국이었다.
강원 양양의 오산리에서 출토된 흑요석. 백두산 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 양양의 오산리에서 출토된 흑요석. 백두산 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피 가공업과 무역도 활발했다. 모피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몽골에 240여 년 동안 지배받았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까지 온 제일 큰 이유는 모피의 획득과 모피세 때문이었다. 베링해는 값비싼 ‘해달’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만주는 서만주 건조지대를 제외하고는 숲과 강이 발달해 생태계가 풍부하고, 훗날 제작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되지만 호랑이, 표범, 곰, 여우, 담비 등의 동물과 약초, 어류가 풍부했다. 어피 생산도 활발했지만,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 담비가죽은 근대까지도 엄청나게 고가로 팔린 무역 상품이었다. 《관자》에는 원조선이 춘추 전국시대에 산둥반도의 제(齊)나라에 문피(표범가죽)를 수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해양 무역을 벌인 증거다. 북한사학은 기원전 2세기에 단궁, 돈피, 문피, 과하마 등과 반어피 등을 한나라에 수출했다고 주장한다(홍희유 《조선상업사, 고대·중세》).

산업·기술·무역·문화 발달한 강대국

또 조개 채집과 무역도 중요했다. 함경도와 중국 옌지(延吉) 등 내륙의 기원전 2000년 때 집자리들에서 명태뼈와 밥조개 등이 나왔다. 무려 19개의 무덤에서 조개껍데기, 팔찌가 대거 나왔다. 부산의 동삼동 패총에서도 수출품인 1500여 점의 조개팔찌가 출토됐다. 그런데 한(漢)나라는 쑹화강, 흑룡강(아무르강), 우수리강, 압록강 지류에서 나온 민물진주를 ‘동주(東珠)’와 ‘북주(北珠)’라 불렀다. 아직 이 유물들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원조선의 산물이니 무역품이었다. 특히 동주는 청나라에서 황제 가족의 옷에만 사용하는 귀중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롄(大連)의 강상무덤에서는 아열대에서 채집된 자안패(自安貝)가 나왔다. 중계무역을 한 증거다. 그 밖에 원조선에서는 신형 무기, 나무, 소금, 흑요석 등의 무역품들이 있었다.

제주 산지항에서 출토된 중국 화폐 오수전.

제주 산지항에서 출토된 중국 화폐 오수전.

이렇게 산업과 무역이 발달하면서 화폐 사용이 빠르게 늘어났다. 처음에는 교환 가치로 사용됐지만 점차 그 자체가 무역 품목이 됐다. 화북 지역의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은 원조선 영역의 20여 군데에서 발견됐다. 평안북도 운송리에서는 5000점이 출토됐는데, 여러 무덤에서 수천 개씩 발견됐다. 기원전 3~2세기 세죽리(영변)의 한 무덤에선 2000개가 나왔을 정도다. 그 밖에도 반량전(秦), 오수전(漢) 등 중국 화폐가 요동에서 제주도까지 발견됐는데, 이는 원조선 무역권의 범위와 상인들의 활동 상황을 알려준다. 랴오닝성(遼寧省)의 금현과 여대시, 평안북도(자성리)와 평안남도(청송리) 등의 원조선 무덤에서 ‘일화전(一化錢)’ ‘명화전(明花錢)’이라는 생소한 금속화폐들이 발견됐는데, 북한사학은 일화전을 원조선의 화폐로 본다.

중국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

중국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

원조선은 신비의 나라, 관념의 나라가 아니었다. 정치와 영토의 나라만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실재했고, 후기인 위만조선은 이미 흉노와 남월(광둥성 일대) 등을 제압한 한나라와 무역권을 놓고 1년 이상 전쟁을 벌였다. 그만큼 산업과 기술, 무역, 문화가 발달한 부국강병의 나라였다. 상실한 땅, 망각한 땅, 만주는 동아시아 최고의 자원 지대며, 원조선의 소중한 경제 영토였고, 고구려와 발해의 국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