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단군왕검에 대하여 /글쓴이 : 이계석

새밀 2019. 11. 24. 12:30
단군왕검에 대하여(야후에서)
글쓴이 : 이계석 날짜 : 2004-01-11 (일) 12:54 조회 : 3076

단군왕검에 대하여

고조선의 시조 단군성조는 배달의 말기, 신묘(서기전 2370)년 5월 2일에 탄생하셨다. 신인의 덕으로 원근에서 외경하여 14세 되는 갑진(서기전 2357)년에 웅씨왕으로부터 비왕(부왕)으로 임명받아 24년간 "대읍국(大邑國)"의 국사를 섭정하였다. 38세 되는 무진(서기전 2333)년에 웅씨왕이 전사하자 "단국"으로부터 귀국하여 배달국 말기의 혼란을 바로잡고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오르셨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종교(신교)의 제사장과 군장으로서 겸임하는 관명 이다. 단군 성조는 환국과 배달의 정통정신을 계승하여 옛 신시(神市)의 신교(神敎) 정신을 크게 부흥시킨 분이다. 이 신교문화는 한민족 고대 문화사상의 총결정체로서 고조선문화의 정치제도, 종교신앙, 경제, 풍속, 지리와 당시 동북아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관건이 되는 열쇠이다. 다음의 신문 기사에 실려있는 구소련학자 유엠 푸진의 말과 같치 고조선은 동방문명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방의 학자도 최소한 이 정도를 알고 인정하는데, 후손으로서 우리는 실존한 조상을 '호랑이와 곰의 신화'로 해석하여 제 뿌리를 망각 부정하고 외 래정신에 근 2천 년이나 오염되고

병들어 있으니, 묵은 기운을 깨부수 어내는 깊은 자기반성과, 뿌리부정과 자기부정에 새한 철저한 회개운 동, 즉 민족사 광복의 개벽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하리라. 단군 성조는 비서갑에 사는 하백의 따님과 결혼하여 부루 ·부우 ·부소 ·부여 네 형제를 두었고, 배달의 "삼신의 세계관"을 근거로 한 신교의 정치조직을 계승하여 칠대 명신인 삼선 사령의 보좌관을 두고 인간사를 다스리는 삼백육십육 사(366事)를 맡게 하셨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저 유명한 소위 노아의 대홍수 당시에, 시기는 이와 조금 다르지만 단군성조가87세 되시던 정사(78, 서기전 2284) 년 2월 1「일에 동방의 중국과 고조선의 영토에도 대흥수가 발생했다. * 홍수가 범람한 다음해인 무오년 「월 5일에는 운사 배달신으로 하여큼 강화의 전등산에 삼랑성을 축조케 하고 마리산에 제천단(참성단)을 쌓게 하셨다. 이 때 강남의 백성이 총 8천 명이나동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년 뒤 신유(91세)년에 단군성조는 친히 이 마리산에 올라 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셨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

이 동방의 대홍수사건은 중국 고대사의 첫 왕조인 하(夏)나라의 개국에 얽혀있는 내용과도 연관성을 갖고 있다. 당시 요순시대의 중국천지가9년간 계속된 대홍수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동방 고조 선의 천자 단군성조는 105세 되시던 갑술(서기전 2217)년에 태자 부루를 중국 양자강 남방에 위치한 도산에 보내 도산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고 고조선의 제후였던 순침금이 특파한 우에게 "오행치수 (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다.

말년에 단군성조는 맏아들 부루에게 종통을 전하고 130세 되던 경자(재위 93, 서기전 2241)년 3월 15일에 어천한다. (이 날을 御天節이라 하는데 지금의 세대는 외국 가수 생일은 알아도 제 조상 할 아버지의 탄신일과 세상 떠난 날은 모르고 있다. )

이 단군성조는 세계문명의 시원국가인 환국과 배달의 환웅천황의 대도 (신교)정신을 정통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고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 진한 ·번한 ·마한)"으로 나누어 진한(만주)은 단군천왕 이 직접 통치하고 마한(한반도) 번한(요서 ·북경일대)은 부단군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당시의 요임금(唐나라)과 그를계승한 순나라는 단군성조 관경의 제후였다.

우수주나 도산이란 땅위치가 암시해 주고 있듯이, 단군성조 당시의 고조선시대는 신교의 삼신사상을 기반으로 한 "삼한관경제 (三韓管境制)"로서 동방문명권을 통일하고, 황하 ·양자강 유역과 만 주 ·한반도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통치한 한민족문화사 최대 의 전성기였다. 이러한사실은 중국 학자들이 발표한 다음의 조사결과 에서도 확실시되고 있다.

이제까지 북경대학과 호북성 전문가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약 3천 년 전에 세워진 초(楚)나라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양자 강 유역의 호북성 의창현에서 하(夏), 은(殷), 서주(西周) 시대-약 4,000년 전∼약 2750년 전에 이르는 고대왕조의 도기 와 파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황하 문명의 유물들과 일 치하여 양자강 유역도 같은 광역(廣域) 황하 문명권에 들어간다는 대단히 중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양자강 유역에서도 빈번한 교류가 일어났으며 황하-양자강의 광범한 유역에서 이 고대 문명이 대단히 번창사였으며 은(殷)나라 때는 남북의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1983년 1월 15일) 어디 이뿐이던가 ! 『단군세기(檀君世紀)』의 기록을 보면 지금의 몽골지역도 고조선의 통치권 안에 있었다. 이곳 몽고리(몽골)의 통치자를 단군께서 친히 임명하신 것이다. 4세 단군 오사구는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임명하였는데, 금일의 몽골족이 그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징기스칸의 칸(汗)은 한사상의 한과 직접적 연관이 있고 왕(King)이란 뜻이다] 최근의 몽골지역 답사내용을 보면 몽골의 문화가 동방 고조선민족 ?br> ?신교문화와 같은 뿌리임을 다시 실감하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서 내외몽골의 뿌리 깊은 민간종교신앙인 '오보'는 우리의 서낭당과 같고, 오보제(祭)는 소도제천풍속 그대로이며, 백색 숭상, 고수레 · 돌장승 · 깃털장식 ·씨름 ·샤먼의식 등의 풍속, 고대의 묘제 ·청동 기 ·빗살무의토기 등의 유적유물, 몽골반점, 용모, 언어(말), 신앙 등 이 우리와는 혈통적 친연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한 동일문화권으 로 해석되고 있다. [「몽골학술기행」 조선일보 1990.8.14.(1회) ∼ 12. 20.(29회), 「몽골문화탐방」 중앙일보 1990.8.16.(1회)∼91.2.18.(24 회)]
더욱 뚜렷한 신교문화권의 동질성을 보면 일찍이 서기전 3백년부터 4백년간 몽골 등 북방 초원지대를 석권했던, 몽골이 본래 고향인 흉노 는 삼한으로 다스린 고조선의 삼신사상의 신교통치조직을 그대로 본 따서 선우를 보좌하는 좌·우현왕(左右賢王) 제도를 두었고, 고조선의 신교 소도(蘇塗)신앙과 똑같은 '휴도(休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사기』 「흉노열전」). 이와같이 정치조직과 종교신앙, 언어, 풍속이 같았다는 것은 곧 고대에 몽골지역이 고조선 신교문화권에 속한 문화강역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 동방문명을 선도한 고조선문화의 생생한 증거들

최근의 고고학 발굴과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조선 강역인 만주지역 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는 서기전 2400년경으로 밝혀져 고조선은 초기부터 이미 국가사회에 진입해 있었음이 명확히 입증되었고 이제는 상식화되고 있는 역사의 진실이다. (윤내현, 『한국고대사』 64∼65쪽) 갑골(甲骨)문화도 본래 동방 동이족이 창조하고 계승 발전시킨 동이문화이다. 동이족의 활동지역인 발해연안 북부에서 최초의 갑골(서기전 3500년경)이 출토되는 등 초기 갑골은 주로 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갑골은 중국 고대왕조 중에서 전형적인 동방 동이계열인 은(殷)나라에서 많이 숭상했는데 상제님(하느님)을 위시하여 조상 신과 산천, 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복활동을 행하쳤다. (이 형구, 『한국 古代文化의 기원』 107∼113쪽)

고대문명의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문자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고대사회에서 일찍이 문자의 존재가 확인되었다(서기전 2000∼1500년경의 도서문자). 뿐만 아니라 최근에 만주 요녕성 지역에서 서기전 2000년경 청동기시대 초기의 석경(石磬 : 통치계급의 의례에 사총되는 전통악기)이 잇따라 출토되었고, 한반도 두만강 유역에서 서기전 2000년기 전반기의 뼈피리가 발견됨으로써 동방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악(찰똔)이 발생해 민족음악으로 성장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민족음악의 기원은 이미 배달 신시시대에 '공수(貢壽)'· '두열(頭列)'이 있었고 고조선시대에는 저 유명한 '어아가(於阿歌)'가 있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그리고 발해연안 북부, 송화강 유역의 만주지방, 한반도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는 고조선시대 청동기문화의 전형적인 유형인 '발해연안 식 청동단검'(비파형 단검)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은 고조선의 강역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책, 113∼131쪽) 중국학자 서량지는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족이 창시한 것이다"라고 하여 동이 조선족이 책력법을 창시하였음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천자(天子) 사상 ·천자제도 또한 동방조선족이 창시한 것이다. 동한(東漢)의 채 옹이 지은 『독단(獨斷)』 상권을 보면 "천자는 동이족이 부르던 호칭이다. 하늘을 다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는 까닭에 천자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여 천자라는말이 중국의 것이 아닌 본래 동방조선족의 말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에 동방조선이 천자의 나라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짓없이 전해주는 기록이다. 이는 28세의 청년시절에 공자가 자기 스승인 동이족 담자를 찾아가 동이의 천자제도를 배웠다는 사실에서도 더욱 뚜렷이 입증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단군의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였고, 법률제도(팔조법)가 있 었으며, 문자(원시한글인 가림토 ·고대신지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볼 때 더욱 명백히 국가사회였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꼬한 화폐제도 (명화전 ·일화전, 팔조법 중 50만 전 배상 내용), 조세제도, 토지제도, 역(易)철학과 음양오행 상수(象數)학, 책력법 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시대였다.

단군의 고조선 왕조는 모두 47세 단군 열조(列組)가 2,096년동안 다스렸다. 동아시아 전역을 광역동방문화권으로 묶어두고 통치한 오대 한민족사의 최대의 전성기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신교문화의 융성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