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이성시 지음 / 박경희 옮김
이성시 지음 / 박경희 옮김

일본 진구왕후가 신라를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그림. 왼편 성문에 ‘고려국 대왕'이라고 쓰여 있고, 오른쪽 위의 그림 제목은 ‘三韓’을 ‘三漢'으로 틀리게 썼다. 삼인 제공
‘일본서기’에 따르면 주아이 천왕이 즉위 9년(199년) 규슈 남부의 구마소 일족을 치러 갔다가 급사하자 진구왕후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향했다. 보물이 많은 신라를 먼저 치면 구마소 일족은 자연히 항복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것. 진구왕후 일행이 바람과 파도, 큰 물고기들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신라에 이르자 신라 왕은 신하의 예를 취하기로 맹세하고 배 80척에 공물을 실어 일본 군대를 따르게 했다. 신라가 일본에 복속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구려 왕과 백제 왕은 스스로 일본 진영에 찾아와 신하가 돼 조공을 바치기로 했고, 진구왕후는 이 땅을 조정의 직할 영지로 삼고 삼한이라고 일컬었다는 게 삼한정벌 설화의 요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조작되고 윤색된 ‘일본서기’ ‘고서기’에 기록된 삼한정벌 설화를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실(史實)로 여겼다는 점이다. 이를 근거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고대로부터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강변해왔다. 임진왜란, 조선 병탄은 물론 청일전쟁, 러일전쟁도 같은 차원에서 인식했다. 침략이 아니라 옛 영토의 회복이라는 얘기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크고 극복하기 어려운지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