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⑫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인류 최초의 ‘요하문명’

새밀 2019. 5. 1. 12:54

⑫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인류 최초의 ‘요하문명’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2-11-17 18:08:2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우리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하고 잃어버린 역사와 땅을 다시 찾아야 함에도 우리들은 아직도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 인식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위정자로부터 정치인이나 언론인, 학자들도 그렇게 열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TV에서 역사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사회자까지도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고 하면서 만주가 지금은 중국 땅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역사공부를 제대로 해서 간도가 엄연히 우리 영토이고 다시 되찾아야 할 땅임을 제대로 알고 사회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하문명(遼河文明)이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000년 이상 앞서는 사실에 대해 중국은 발 빠르게 다기원론(多起源論)을 펴며 황하문명(黃河文明)이 여러 곳에 있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국가 차원에서 요하문명, 황하문명과, 장강문명도 중국의 황제(黃帝)가 주도했다고 날조·왜곡하고 있다. 황제(黃帝)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우리의 치우천황(蚩尤天黃)도 자기들의 시조로 모셔가며 중국역사를 재편하고 요하를 중국역사에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악랄한 일제의 역사말살 이제 바로 세워야
 
우리는 잃어버린 역사와 영토를 다시 찾고 세계로 뻗어 나가는 준비를 해야 한다. 1984년 요동의 우하량에서 발견된 ‘홍산문화유적’(紅山文化遺蹟, 요하문명·遼河文明)을 보면 놀랍다. 5500년 전 신전(神殿)이 있었고,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초기 강력한 국가(고조선)가 형성돼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도 우리나라 학노(學奴)들은 일제가 우리에게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1922년 사이토 미노루(齊藤 實)가 조선총독으로 오자마자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해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을 지금도 금과옥조로 알고 또한 받들고 있으니 그 무지함이 실로 한심하다. 일제는 우리나라 상고사의 말살을 위한 역사왜곡을 한국강제 병합 이전부터 추진했다. 이후 1910년 한국을 강탈한 초대 데라우치(寺內正穀) 총독은 취임하자마자 조선의 관습과 제반 제도에 대한 조사를 한다는 미명하에 같은 해 11월 전국의 각도 및 군경찰서를 동원해 그들이 일방적으로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압수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일대의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서사(書肆=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를 뒤졌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관계 조선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 열전류 및 장지연(張志淵)의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이채병(李採丙)의 애국정신, 신채호(申采浩)의 은지문덕 등이다. 일본은 우리의 고대사나 역사서를 1년 2개월 동안 51종 22만여 권의 서적을 색출해 전부 불살랐다. 이는 조선사를 말살하기 위한 첫 만행이었다. 이후 사이토(齊藤 實) 총독은 우리나라 역사와 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가치관의 변질정책을 폈다. 사이토는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나 역사 그리고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어 그것을 과장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해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해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고 명령했다.
 
사이토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동시에 일본의 사적(史蹟),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고 했다. 이렇게 ‘교육시책’을 떠벌린 것을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는 학노(學奴)들이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 자리를 차고 앉아 안주하고 있으니 역사교육이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후쿠사와 유기치(福澤諭吉),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우치무라 간소(內村鑑三)등 을 “선각자다” 내지 “동양의 성자다”라고 하면서 추겨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를 모두 배척하고 배격한 자들이다. 우리를 악우(惡友)라고 하면서 멸시한 자들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아직도 이들을 추앙하는 무리가 있다. 이런 늪에서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 우리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운동이 거국·거족적으로 전개돼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찾아야 한다. 단군은 우리 세년가(歲年歌)에서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오늘은 고려시대의 세년가(歲年歌)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시대의 세년가(歲年歌)에서 보는 단군
 
단군에서 고려 공양왕까지의 치적을 기록한 ‘동국세년가’는 권도가 1436년 찬한 것이다. 1524년에서 1529년까지 유희령 군수가 목판 활자로 편찬한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이란 책 첫머리에 바로 세년가(歲年歌)가 기록돼 있다. 이 책을 통해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도 못 찾아냈던 동국세년가(東國歲年歌)를 최태영 선생이 찾아냈던 것이다. 최 선생은 “이 동국세년가는 세종실록에도 없었던 진짜 세년가의 발견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의 표제란 본문상단에 제목을 단 것을 의미한다. 또 음주라 함은 지명·인명 등 고유명사의 음을 주로 단 것을 말한다. 이 표제음주동국사략은 영주지방의 목판 활자인데, 수정본인 재판까지 찍어내 3판까지 찾아냈다. 현재 연세대와 고려대 등 여러 곳에 산재해 있으나 전집이 갖춰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원본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있는 것이므로 내용은 다르지 않다.
 
표제음주동국사략의 저자 유희령은 책 첫머리에 의도적으로 ‘동국세년가’를 실어 자주정신을 표방했다. 그 내용은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記)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즉, 4천년 전에 건국한 단군조선의 전기 1천년을 통치한 단군 47대에 대한 기록이 동일하다. 이 책은 다른 책처럼 신라위주로 하지 않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또 신라에 대한 발해의 역사를 밝힘으로서 후일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한 유득공의 선구가 됐다. 권도가 찬한 동국세년가(東國歲年歌)는 이렇게 시작된다.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 완전히 구분되어 삼면의 큰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녘은 대륙에 연한 중방(中方) 1천리 이것이 조선이다. 아름답고 예의를 아는 나라이다. 환국에서 환웅이 온 인류를 크게 이롭게 할 만 하므로(환웅으로 하여금) 무리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 보냈다. 그의 아들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 단군이다.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 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여기서도 기자조선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기자조선은 중국에 대한 외적 사대관계로 요공(要功)을 하느라 우리 역사에 접목시켜 왜곡된 것이다. 또한 고조선이 BC2333년에 건국해 2천년동안 존속했다는 것은 모두 규원사화(揆園史話)와 일치하지만 전기조선(前期朝鮮)이 1천여년 47대이고, 후기조선(後期朝鮮) 900여년 41대라고 한 부분은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단군조선 2천년역사의 47대라고 한 것과 맞지 않는다. 이 점은 연구 조사해서 바로 잡아야 할 과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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