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의 대화] 왕건의 혼이 깃든 개성 만월대
조선 전기 문호 서거정(1420~1488)은 "자기의 증조를 조상으로 모시지 않고 도리어 증조모의 아버지를 조상으로 모시니 이런 이치가 있을까"라고 비판했다.
당나라 귀인의 정체를 두고 당나라 제9대 황제 숙종(711~762·재위 756~762)이라는 설이 당대에 제기됐다. 그러나 숙종은 어려서부터 외국은커녕 대궐 밖도 나간 적이 없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과 고구려 고토 회복을 국시로 삼았다. 오늘날 이를 근거로 작제건의 아버지가 재력을 가진 고구려계 재당 상인이었을 것으로 추론한다.
왕건이라는 이름도 실명이 아니다. 고려 후기 문인이자 사학자인 이제현(1287~1367)은 "왕(王)씨 성은 고려 건국 이후 어느 시점부터 붙여졌을 것"이라고 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의심이 많았다. 아버지에 이어 궁예 밑에서 벼슬을 했던 왕건이 처음부터 왕씨 성을 가졌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건`이라는 이름도 신라시대 왕이나 높은 벼슬아치의 호칭 또는 높임말인 간(干), 찬(餐·粲)처럼 그냥 존칭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제현은 분석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에서 즉위한 왕건은 이듬해 고향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그와 동시에 황제국을 표방하면서 송악산 기슭에 황제의 권위에 걸맞은 거대한 황궁을 짓는다. 고려황궁에는 수많은 전각이 자리했다. `고려사` 기록에서 정전인 천덕전(天德殿), 편전인 상정전(詳政殿), 침전인 신덕전(神德殿) 등 100여 개 건물 명칭이 확인된다. 현종 2년(1011) 거란 침입 때 개경과 궁궐 대부분이 파괴돼 다시 지어진다. 이때 새로운 정전으로 회경전(會慶殿)이 세워졌다. 고려궁궐은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으로 또다시 잿더미가 됐으며 대몽항쟁기(1232~1270)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 침입 때 수도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고 우왕 이후 별궁인 수창궁(壽昌宮)이 궁궐을 대신한다.
고려궁궐 터는 만월대(滿月臺)로 곧잘 불린다. 궁궐 안에 있던 망월대(望月臺)가 변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조선시대 들어와 빈터를 찾아 왕조의 흥망을 노래했던 시인묵객이 붙인 감상적 명칭이 `신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면서 통용됐다고 본다.
만월대는 남북교류의 중요한 상징처럼 인식된다. 남북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7차에 걸친 공동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 40여 곳, 축대·계단 등 유물 1만6500여 점을 찾아냈다. 만월대 조사사업은 남북관계가 경색되던 2015년에도 중단되지 않고 6개월간이나 지속됐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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