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民族史

새밀 2019. 7. 22. 11:50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民族史

학법성 | 조회 136 |추천 0 | 2018.08.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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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린 날짜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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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그 :기자, 조선
  •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의 실상 <br /><br />위만조선과 기자조선은 없는 역사이고 유령의 국가 입니다. <br /><br /><br /><br />위만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 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br /><br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그의 반려자인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br /><br />숙청하였는대, 이때 연나라 왕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br /><br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br /><br /><br /><br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br /><br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 <br /><br />(BCE194년) <br /><br /><br /><br /><br /><br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갈석산부근)의 <br /><br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 하다. <br /><br /><br /><br />따지고 보면 "위만조선" 이라는 나라이름은 결코 용납할 수 없고 성립될 수 없다. <br /><br />위만조선이 아니고 "위만왕조" 라든지 "위만정권" 이라는 언어를 써야 마땅할 것이다. <br /><br /><br /><br /><br /><br />그리고 기자조선은 지금으로부터 약3100년 전 상(은)주 교체기를 배경으로 한다. <br /><br />주나라 무왕은 동이족의 명재상인 강태공의 보필을 받아 주지육림에 빠진 <br /><br />상(은)나라 폭군 주왕을 방벌하고, 감금되어 있던 상나라 삼현(기자.미자.비간)중 <br /><br />한 사람인 기자를 풀어 주었다. <br /><br /><br /><br />그런데 풀려난 기자는 조국 상나라가 멸망한 것에 절망하여 동방족의 본고장인 <br /><br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 그때 무왕이 이를 섭섭해 하며 기자를 "조선" 의 제후로 봉했다는 이야기이다. <br /><br /><br /><br />기자조선 역사 또한 새빨간 거짓말이다. <br /><br />[송미자세가]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봉기자어조선" 바로 뒤에 "이붕신야" , 즉 <br /><br />"그러나 신하로 삼지 못했다" 는 말이 나온다. <br /><br /><br /><br />제후도 당연히 신하인데 왜 신하로 삼지 못했다는 것일까? <br /><br />실제로 기자가 새로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하북성 태행산 일대로 주나라와 하등 무관한 <br /><br />고조선 영토였기 때문에 애당초 주나라가 그를 제후로 봉할 수도, 신하로 삼을수도 <br /><br />없었던 것이다. <br /><br />출처:개벽실제상황에서


    '단군 조선'을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 위만 조선으로 분리 "단군 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서 서기전 1122년까지이고, 기자(箕子) 조선은 서기전 1122년에서 서기전 194년까지, 위만(衛滿) 조선은 서기전 194년부터 한무제에 의해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서기전 108년까지 존속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군 조선은 2300여년간 지속된 강대한 광역 국가였고, '기자 조선'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로서, 단군 조선의 서부 변경인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 유역에 서기전 12세기경(서기전 1122년경)에 기자 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단군 조선의 거수국이 된 것이 기자 조선이다.


    '위만 조선'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 조선의 거수국인 기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아닌, 서한의 외신(外臣)이 된 것이 위만 조선이다.
    "기자 조선과 위만 조선이 단군 조선을 계승했다, 즉 단군 조선 ― 기자 조선 ― 위만 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단군 조선의 뒤를 이어 위만 조선이 건국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된, "서기전 194년에 위만이 단군 조선의 왕이 되고, 서기전 108년에 단군 조선이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현행 국사체계는 사실과 전혀 다른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기자 조선, 위만 조선, 한사군(낙랑ㆍ임둔ㆍ진번ㆍ현도의 4개군(郡))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단군 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역사의 주류일 수 가 없고, 단군 조선의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 역사의 주류는 2300년 실사인 단군 조선으로부터 단군 조선을 계승한 동부여ㆍ고구려ㆍ읍루(이전의 숙신)ㆍ동옥저ㆍ최씨 낙랑국ㆍ동예ㆍ대방국ㆍ한(韓, 삼한) 등의 열국 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들은 원래 단군 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단군 조선이 붕괴되자 독립국이 된 것으로 이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남방은 가야ㆍ백제ㆍ신라로 분열되어 사 국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고대사를 단군 조선 → 위만 조선 → 한사군으로 설정한 체계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위만은 중국에서 망명한 자이고, 한사군은 중국의 행정 구역일 뿐이다.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가 서기전 37년에 건국됐는데 한사군이 종말을 고한 것은 서기 313년이다.
    기존 연구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단군 조선 멸망 후 5백여 년간 중국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같은 요동 지역에 고구려와 한사군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한나라 무제가 멸망시켰다는 위만 조선은 평양 지역이 아니라 북경 근처 난하 유역이었다.
    위만 조선이나 한사군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요동 지역이 아닌, 요서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한민족은 위만 조선이나 한사군과는 별도로 요동 지역과 한반도에서 단군 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등 열국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재통합과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