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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새밀 2019. 3. 27. 09:42

한국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장경덕 
  • 입력 : 2019.03.27                   


2017년 포항 지진에서 보았듯이, 때로는 사소한 자극이 엄청난 격변을 불러올 수 있다. 스트레스가 쌓인 지각은 조금만 건드려도 격렬하게 몸을 떤다. 모든 지진이 마찬가지다. 2011년 일본 도호쿠 대지진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6억개와 맞먹는 에너지를 방출했다.
그 역시 바닷속 지각의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됐다. 이처럼 임계상태에 있는 것들은 언제든 거대한 격변을 일으킬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 체제가 바로 그런 상태에 있다. 크고 작은 단층들이 서로 부딪치고 뒤틀리면서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 있는 상태다. 조금만 건드려도 시스템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릴 수 있다. 우리가 지진을 예측할 수 없듯이 이 체제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크게 뒤틀릴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경제와 사회의 온갖 마찰과 알력을 보건대 이 체제가 임계상태에 이른 것만은 틀림없다.

자본주의는 여러 모순을 안고 있다. 많은 이들이 소외되고 불안한 삶을 살게 하는 체제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체제는 없었다. 사회주의에 경도되고 있다는 선진국의 밀레니얼 세대도 갈수록 심해지는 불평등 해소를 요구할 뿐 자본주의 체제의 번영 자체를 포기할 뜻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정부는 이 체제의 가장 큰 강점인 창조적 파괴의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가장 큰 모순인 불평등을 줄여 가려 한다. 그래서 들고나온 것이 혁신적 포용국가의 슬로건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혁신도 포용도 헛바퀴만 돌고 있다. 성장의 활력을 한껏 높이면서 분배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는 해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철학의 빈곤과 전략의 부재, 리더십의 실종 때문이다.

체제 변화를 주도하려면 무엇보다 낡은 이데올로기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양 극단으로 치닫는 이념과 진영 논리를 넘어 현실적인 해법을 찾는 사려 깊은 실용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책들은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영세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몰락을 불러올 수 있는 최저임금 정책을 그토록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계선상의 자영업자는 자본가인가, 노동자인가.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로는 결코 풀리지 않을 문제다.

보수와 진보의 단순한 이분법과 흑백논리는 더 심각한 혼선을 빚고 있다. 혁신성장은 보수의 논리인가, 진보의 논리인가. 현 정부 핵심부는 혁신성장 하면 무조건 보수의 논리로 치부하는 것 같다. 혁신은 창조적 파괴의 다른 표현이다. 혁신적인 기술과 기업은 기존의 시장을 뒤집어엎는다. 주류는 기득권을 잃는다. 그런 혁신을 촉진하는 것, 창조적 파괴의 자유를 주는 것은 급진적 진보의 논리일 수 있다.

옥스퍼드대 경제학자 폴 콜리어는 실제적 문제에 대한 개인의 추론 능력에 회의적인 이들은 전통과 제도에 축적된 지혜를 선호하며 이것이 바로 보수주의라고 했다. 또한 개인의 추론 능력을 믿는 이들은 그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려 하며 이것이 리버럴리즘이라고 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스스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설명할 수 있나. 그저 각자의 기득권을 지키려 스크럼을 짜고 있는 건 아닌가.

현 정부는 양극화 문제에 대해 결연히 맞서 싸우려 한다. 하지만 그 접근법은 전혀 치밀하지 않다. 예컨대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집적효과에 따라 발생하는 지대는 그곳의 집주인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좋은 교육을 받아 대도시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이들, 다시 말해 인적자본이 풍부한 이들에게 더 많이 돌아간다. 정부는 어떻게 하면 대도시의 집적효과를 높여 전문화의 이점과 규모의 경제를 살리면서 공정하게 세금을 물릴지 고민하지 않는다. 불평등의 궁극적 원인인 교육 시스템을 수술하지도 않는다. 그러는 사이 지방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갈수록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은 체제의 내재적 문제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정치의 무능 때문이다. 요즘에는 통합을 말하는 정치인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진정한 사회적 대타협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유권자들은 싫든 좋든 두 극단 중 한쪽을 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체제의 스트레스는 갈수록 쌓이기만 한다. 거대한 두 지각이 마구 비벼댈 때처럼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도 예기치 못한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

[장경덕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