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 시대의 신경중추인 5G 통신과 최첨단 반도체 등 기술패권을 둘러싸고 미국ㆍ중국의 충돌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선도적 리더십을 수성하려는 미국과 추격자 중국이 각을 세우며 기술 분야에서 신냉전이 도래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미·중 수교와 함께 덩샤오핑, 카터에 과학기술 지원 요청 선발대 52명 학자들 美연구기관으로 흩어져 학구열 불태워
4차산업혁명 시대 개막과 함께 본격화된 미·중 기술패권 전쟁 美가 배양한 中기술 파워에 추격 허용할까 전전긍긍 아이러니
개혁ㆍ개방 40년만에 미국이 중국의 기술 추격을 뿌리쳐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는 사실에 적잖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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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40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1979년 1월 미ㆍ중이 수교하면서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는 미국을 방문한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 부총리와 과학기술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과학ㆍ군사기술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중국의 과학기술 현대화를 음양으로 지원했던 건 사실입니다.
1971년 1월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덩샤오핑 부총리. 카터 대통령과 환영 인파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바이두백과]
덩샤오핑은 앞서 78년 당 공식회의 석상에서 “수 만명의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야 한다. 몇 명을 보내고 말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와 중화권 자료에 따르면 그해 9월 중국 전역에서 1만명의 해외 유학 지원자들이 외국어 시험에 응시합니다. 시험을 통과한 1/3 가운데 다시 미국 유학 후보자 700~800명으로 추려집니다. 연구 분야가 중국이 필요한 핵심 과학기술인가를 묻는 정밀 인터뷰를 거쳐 최종 대상자는 50명으로 압축됩니다.
이들은 중국과학원ㆍ베이징대ㆍ칭화대 등 중국의 최고 연구기관의 검증을 받아 추천됩니다. 나중에 베이징대의 수학 교수 2명이 추가돼 1차 미국 유학단이 완성됩니다. 중국은 1차 유학단 이후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일본에도 유학생들을 파견합니다. 중국 교육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렇게 정부 지원으로 해외에 나간 유학생은 약 60만명에 달합니다.
10월 저우페이위안(周培源) 베이징대 총장이 학생 교환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을 매듭짓기 위한 특사로 워싱턴에 파견됩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26일 저녁 6명의 여성 학자를 포함한 52명의 유학단은 가족과 송별의 자리를 갖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낡은 여객기에 몸을 실은 52명의 과학자들은 파리에서 환승해 오전 5시50분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합니다.
정부가 맞춰준 정장과 모직 코트 차림이었습니다. 미국 언론은 도착 일성을 요청합니다.
이 그룹의 리더였던 류바이청(柳百成)이 나섰습니다. “중국 인민은 위대합니다. 미국 시민들도 위대합니다. 우리는 선진 과학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왔습니다. 두 나라 사람들의 우정도 커나갈 겁니다.”
52명의 선발대는 미국 유수의 연구기관으로 흩어졌습니다. 1~2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들의 소회는 어땠을까요. 엔지니어였던 지푸성의 회곱니다.
가장 놀랐던 것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기술 격차였다. 여기선 전화만 하면 바로 주문이 되는 부품을 베이징에서 구하려면 자전거를 타고 수십 시간을 돌아다녀야 가능했다.
류바이청은 “세들어 살던 집주인의 어린 아들이 컴퓨터를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얼이 빠졌던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류는 위스컨신대에서 기초 코딩교육을 받다가 이듬해 금속화학을 공부하기 위해 MIT로 옮겼습니다. 일주일 가운데 6일 반나절을 새로운 기술 학습과 연구에 쏟아부은 류는 일요일 오후 옷가지 세탁과 청소 시간에 숨을 돌렸다고 합니다.
옌다춘(顏大椿)은 당초 2년 유학 기간을 3년 8개월로 늘려 3개 연구기관에서 유체역학을 집중 연구했습니다. “어떤 열매도 쥐지 못한 채 귀국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옌이 투혼을 불태우도록 한 자극제였던 겁니다.
1979년 1월 미국을 방문한 중공의 실력자 덩샤오핑 부총리가 주미 중국대사관에서 52인의 선발대 방미학자들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촨송닷컴]
당시 과제 수행에 대한 스트레스로 앤을 비롯한 학자들은 자살을 시도하거나 경쟁자들을 비방하는 등 사회관계 절벽을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류바이청은 귀국 후 칭화대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진해 싼샤댐 터빈 운영시스템 개발에 기여했습니다.
지푸성은 공업신식부 고위 관료로 복귀해 국책 R&D 과제인 ‘첨단기술 연구발전 계획(863계획)’을 입안해 추진했습니다. 유학시절 지도교수와 함께 쓴 논문이 유력 잡지에 인용되는 등 유체역학 권위자로 성장한 옌다춘은 지금은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베이징대 유체역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개혁·개방 40년과 중국의 과학기술 추격사는 정확히 궤를 같이 합니다. 중국은 미국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선진 과학기술을 빨아들이는 한편 불법을 동원해 기술적 도약의 밑거름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중국의 도전적 파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에서 배양된 겁니다.
중국은 AIㆍ5Gㆍ빅데이터ㆍ클라우드 등 핵심 기술과 반도체 등 부품소재 국산화를 통해 2025년 제조 강대국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른바 중국제조 2025입니다. 미국은 중국이 속내를 드러내고 본격적으로 기술전쟁에 뛰어들자 화들짝 놀라 집중 견제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사진 중앙포토]
2020년 5G 기술 상용화를 앞두고 미국은 독일·캐나다·일본 등을 상대로 중국 화웨이 통신장비 확산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중국 통신장비 업체 ZTE(중싱통신)에 대해서도 대북 및 대이란 제재 위반을 이유로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막았다가 ZTE가 1조원 이상의 벌금을 물고 나서야 미국과 거래를 재개했었죠.
메모리칩 생산에 나선 푸젠진화반도체에 대해선 미국 기업의 반도체 장비 수출을 제한시켰습니다. 이쯤되면 기술패권 신냉전의 서막이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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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전쟁의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상호 신뢰하기 어려운 체제를 미ㆍ중이 대표한다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저서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중국과 미국 등 서방세계의 동상이몽과 근본적인 불일치의 이유를 파고듭니다.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포용하되 견제한다’는 이중전략을 두고 두 가지 결점을 지적했다. 우선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그 방향으로 가면 중국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중국이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규범과 가치에 편입될 것이라는 서방의 기대는 여지 없이 깨졌는데 그 배경에 개방적이고 투명한 민주주의 체제와 중국공산당 정권이 양립하기 어려운 구조적 모순관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깁니다.
사진 바이두백과
독일과 일본처럼 중국이 미국이 이끄는 국제법적 질서 내에서 자기 자리를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은 이 두 나라와 다르다면서 리콴유를 인용합니다. 리콴유의 평가입니다.
중국은 중국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주장하지, 서방의 명예회원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리콴유의 통찰대로 중국과 미국은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일까요. 중국의 주장이 현실이 되려면 기술패권을 향한 길은 중국이 돌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 지점에서 선도 입지를 굳히려는 미국의 집중 견제와 압박은 피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적 자금 투입과 기술 추격을 통해 이를 돌파할 수 있을지 아니면 중국은 일본ㆍ소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중국의 현실 인식이 자기최면에 불과했는지 스스로 입증해야 합니다. 중국의 운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