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의 자가 수필

바가지 우물

새밀 2018. 4. 18. 15:52

바가지 우물/미산 윤의섭


물은 말 그대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이다. 그 생명수를 담고 있는 커다란 그릇이 우물인 셈이다.
우물은 보통 지하 암반수나 물줄기를 수원으로 하는 동네 물의 공동 저장고였다. 우물은 옛날부터 ‘바가지 우물’
이란 이름으로 불려 내려왔으며, 언제나 바가지로도 쉽게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물이 넘쳐흘러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한다. 고대 농업 생활에서 물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마을에 물이 사시사철 용솟음치는 우물이
있어야 했다.


경기도 오산시 북오산 요금소를 나오면,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여 봄에는 진달래가 피고 여름에는 오리가
새끼를 치는데 넉넉한 작은 골짜기가 있었다. 가을이 되면 참나무 열매를 찾아 다람쥐가 놀았고, 겨울에는
백설이 덮인 푸른 소나무의 기상이 그윽하다. 사람들은 붉은 진달래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작은 모양의 붉은
산"이란 뜻으로 적현봉(赤峴峰)이 불렀다. 우리말로는 "부릉구리"라 부르기도 한다. 높지 않은 봉오리는 어미
가 아기를 품에 안듯이 양편에 능선이 내리흘러 작은 분지를 만들었다. 분지에는 샘물이 솟아올라 작은 습지를
이룬다. 4계절 샘이 솟아 마르지 않았고, 산의 북변에 위치한 관계로 건조하지 않았다. 지나던 오리 한 쌍이
내려 노닌다 하여 오리골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또 산주위에는 소나무(松美) 오동나무(梧美) 대나무(竹美)가
아름다워 삼미(三美)라는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


이 바가지 우물은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은자(隱者)의 한 살림하기에는 적합하였다. 홍진(紅塵)을 피해 일생을
살며 겸손의 도를 쌓아 가던 은자에게 복권(復權)의 빛이 다시 비추니 입향 가문을 세우는 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필봉을 주산으로 하는 적현봉 아래에 형성된 기혈을 찾아 입향조의 묘를 썼다. 묘가 있는 분지 아래로 굽이돌아
펼쳐진 농토는 평야를 지나 저 멀리 독산과 황구천 그리고 멀리 서해를 향했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작은
봉오리들의 지맥은 동탄 기흥 수원 영통을 거쳐 조산(祖山) 광교산에 머문다. 이 묘역에서 광교산에 이르는 수원
지역은 우리나라 경제의 심장 반도체산업이 용트림하고 있다.


입향조를 장사지낸 2세는 좀 더 넓은 농지가 있는 방곡의 바가지 우물 앞에 택지를 정하고 주변의 농토를 개척
하여 영세의 기초를 세웠다. 겸손과 배려 그리고 근면과 성실의 가풍은 내리 500년의 명가로 존속하고 있다.
제2의 바가지 우물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후손이 번성하니 농토를 늘려야 하고 집터를 추가로 마련해야 했다.
명학에 제3의 바가지우물가에 지손(支孫)이 살아갈 집터가 마련되었다. 마을의 혁신을 위해 학교를 세울 때,
명학 바가지 우물 앞에 사립학교를 세워 주민 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가 번영하여 더 넓은 학교 터로 옮기게
되고, 주변의 철도 통과 공해로 불편하여 또 한 번 옮겼으니 지금의 삼미초등학교이다. 오리골 산소 앞의 철도를
100년 만에 옮겨 훼손된 옛 자연을 복원하였다. 격변하는 시대는 도시 시설로 개혁하며 바가지 우물은 없어 젔다.

 

바가지 우물은 우리의 조상들의 유일한 생명의 샘이라는 추억을 회상하게 한다. 옛날 호수도 없고, 강에서도 멀어
물을 얻기 어려운 야산 지역의 척박한 환경에서 뿌리내린 조상의 얼이 서린 역사의 기억으로 전한다.